[제5화] 섬진강이 보듬어 흐르는 곳 - 하동벚꽃십리길 / 금오산
봄이 겨울을 밀어내고 찾아왔던 어느 날, 나와 짝꿍은 남쪽으로 내려갔다. 우리가 이번에 찾아간 곳은 섬진강이 보듬어 흐르고 지리산이 품고 있는 곳, 경상남도 하동이다. 지리산이 마을 뒷산으로 자리하고 앞으로는 섬진강이 유유히 흐르는 곳, 흔히 말하는 배산임수 지형을 잘 보여주는 곳이 바로 하동이다. 우리는 그 곳에서 완연한 봄내음을 만끽했다.
벚꽃이 없는 벚꽃십리길, 하지만...
"이게 다 벚나무야? 근데 꽃은 하나도 없네..."
우리가 하동에서 머문 곳은 십리벚꽃길 근처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벚꽃이 완연한 시기에 이 곳을 찾았다. 하지만 평소보다 봄이 빠르게 찾아온 탓에 우리가 갔을 때에 벚꽃은 다 떨어지고 없었다. 벚꽃 대신 우리를 반겨주는 것은 벚나무의 싱그럽고 작은 잎들이었다.
하동의 십리벚꽃길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벚꽃 명소 중 한 곳이다. 화개장터부터 쌍계사까지 이어지는 길 양쪽으로 벚나무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데, 해마다 봄만 되면 이 곳의 벚꽃을 보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오기 전에는 이 곳의 벚꽃을 볼 수 있다는 기대감이 가득했는데, 섬진강에 들어서면서부터 기대감은 실망감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리고 십리벚꽃길 초입에 들어서자마자 나와 짝꿍은 실망스런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리의 여정은 실망 가득한 채 시작되었다.
하지만 실망감이 즐거움으로 바뀌는 데는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십리벚꽃길은 대한민국의 아름다운 길로 꼽힐 만큼 벚꽃이 없어도 충분히 아름다운 곳이다. 커다란 벚나무가 만들어내는 터널 아래를 산책할 수도 있고, 벤치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쉬지않고 흐르는 화개천의 물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 그리고 지리산의 좋은 공기를 마시고 자라는 녹차밭의 싱그러운 녹색이 가득하고, 중간중간 '나도 여기 있어요'라고 소리치는 듯한 화려한 색깔의 꽃들이 아름다운 풍경에 색감을 더한다.
"하동 어때? 맘에 들어?
"여기 너무 평화롭고 좋다. 모든 상념과 스트레스가 사라지는 것 같아.
고마워. 이런 곳을 데려와 줘서. 물소리, 새소리, 바람소리... 모든 게 너무 좋아."
짝꿍은 하동에 오기 전에 나한테 이런저린 질문을 던졌다. 하동이란 지명 자체가 낯설기 때문에 왜 긴 시간 운전해 가면서 이 곳에 가려고 하는지 이해가 잘 안된다고 했다. 나는 자세한 대답을 해주지 않을 채 짝꿍을 데리고 하동에 도착했다. 하동에 오기 전, 짝꿍은 바쁜 일에 치이고 스트레스가 많은 상태였는데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나는 하동을 고집했다.
짝꿍이 스트레스와 번민들을 극복하는 데 지리산과 섬진강이 주는 자연의 평화로움과 고즈넉함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나의 목적은 100% 적중했다. 하동서 하루 머물고 난 후 짝꿍의 얼굴은 완연하게 밝아졌고 편안해졌다. 우리가 주말이 아닌, 평일에 하동을 찾아서 더욱 그런 효과가 크게 발현되었는지도 모른다.
십리벚꽃길을 나와 짝꿍이 몇 번을 거닐었는지 모를만큼 이 곳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중간중간 만나는 꽃들을 반가워하고, 걷다가 벤치를 발견하면 가만히 앉아서 자연이 만들어내는 합주를 들었다. 그리고 하동 여행을 모두 마치고 떠날 때에도 짝꿍은 십리벚꽃길을 한 번 더 걷고 가자고 이야기했다. 그만큼 짝꿍은 이 곳을 좋아했고, 편안해했다.
바다를 보러 산을 올라가다.
"왜 계속 올라가? 언제까지 올라가는 거야?"
우리가 하동에서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금오산이다. 하동 남쪽 끝에 위치한 금오산은 정상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일품인 곳이다. 금오산이 그렇게 낮은 산은 아닌데, 정상까지 차를 가지고 올라갈 수 있기 때문에 쉽게 올라갈 수 있었다. '쉽게' 올라갔다고는 하지만 정상까지 가는 길이 꽤 가파르고 좁은 길이 끊임없이 이어지기 때문에 집중해서 운전해야 한다.
짝꿍은 금오산 중간 정도를 오를 때부터 언제까지 올라가는 거냐고 계속해서 물어봤다. 주변에 아무 것도 없는 산 속을 계속해서 올라가다 보니까 조금은 무서웠던 것 같다. 그나마 중간중간 반대편에서 내려오는 차들이 짝꿍의 불안감을 조금은 달래주었다. 나는 금오산 정상에서 보는 그림 같은 풍경을 짝꿍에게 꼭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에, 짝꿍을 달래가면서 조심스레 운전했다.
"여기야? 와...! 숨이 턱 막히네. 지금이 살면서 가장 높게 올라온 거 같아."
그렇게 금오산 정상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짝꿍은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금오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남해바다의 모습은 그 풍경을 묘사할 수 있는 수식어를 찾기 힘들 정도로 아름답다. 내가 이 곳에서 남해바다를 처음 내려다 봤을 때의 기분을 짝꿍이 느끼고 있는 듯 했다. 풍경이 너무 아름다우면 그 모습에 압도당하곤 하는데, 금오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우리를 충분히 압도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렇게 우리는 가만히 서서 우리가 내려다보는 모든 장면을 우리의 눈에 담아냈고, 그 장면은 아마 꽤 오랫동안 우리의 기억 속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에 우리는 주변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예전에 내가 왔을 때는 이 곳이 그냥 전망대였는데, 지금 금오산 정상에는 짚라인이 있어서 이 것을 타러 오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짚라인 회사에서 운영하는 차를 타고 이 곳까지 올라온 후에 짚라인을 타고 금오산을 내려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케이블카 정거장이 한창 건설 중이었다. 케이블카까지 완성되면 이 곳을 찾는 사람들이 정말 많아질 듯 했다. 아마 하동의 새로운 명소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