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국보다 큰 이름을 가진 여왕, 김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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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보다 큰 이름을 가진 여왕, 김연아

무영심검 0 290 2015.12.25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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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조성진이 쇼팽 콩쿠르에서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우승을 차지하면서 쏟아져 나온 많은 이야기 중에 ‘김연아와 닮았다.’ ‘김연아를 연상 시킨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예술과 스포츠로 큰 갈래에서 분야가 나뉘고, 김연아가 국가대표로 처음 국제대회에 모습을 드러냈을 당시 세계 피겨계에서 한국이 차지하고 있던 위상은 어린 영재들이 콩쿠르를 휩쓴 지 오래인 클래식 음악계와 비교하기 미안할 만큼 낮았다. 하지만 대중들이 두 사람에게서 감지하는 닮은 느낌이 무엇인지는 알 것 같다. 어린 나이에 국제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는 결과론만이 아니다. 자기 분야에 꾸준히 매진하며 오로지 스스로가 해낼 수 있는 것에 집중하는 사람 특유의 힘과 밀도가 두 비범한 천재에게 특유의 존재감을 만들어 냈다. 

흔히들 무대 예술과 가장 가까운 스포츠로 피겨 스케이팅을 손꼽는다. 점프, 스핀, 스텝, 스파이럴 등의 정해진 기술을 수행하여 난이도와 정확성, 숙련도를 겨루는 종목이지만 그 기술들은 모두 음악과 연기, 춤으로 이어져야 한다. 뮤지컬 마니아 중에도 이 스포츠의 팬이 많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초등학교 6학년, 국가대표로 선발되기 직전이었지만 이미 언니들을 이기고 있던 김연아에 대한 첫인상은 나이와 국적이 의심스러울 만큼 기술 능력이 독보적이고 그에 비해 상대적으로 표현력은 아쉽다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관객 없이 빈 객석을 앞에 두고 경기를 치러 온 한국 선수들이 고질적으로 표정 연기를 어려워한다는 이야기가 많았는데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 한 독보적인 기술적 성취를 보여준 김연아도 이 점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런데 유난히 마르고 긴 팔다리로 붉은 비로드 의상을 입고 표정 변화가 거의 없이 프로그램을 수행하는 그 어린 여자아이는 <카르멘> 모음곡으로 빙판 위에서 춤추는 동안 아름다운 곡조가 반짝여야 하는 순간을 본능처럼 정확하게 짚어내는 음악성을 보여주었다. 아직 만개하지 않은, 누구도 일깨워주지 않은 어린 재능이 스스로 도드라지는 듯 했다. 

이듬해 열네 살의 나이로 최연소 국가대표가 되고 주니어 그랑프리 시리즈 우승을 시작으로 무수한 ‘한국인 최초’의 포문을 연 김연아가 국민적인 헤로인의 자리에 오르는 것에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동갑내기 라이벌 아사다 마오의 우승을 기원하는 온갖 이벤트가 경기장 안팎으로 분위기를 돋우던 2007년 도쿄 세계선수권에서 완벽한 쇼트 프로그램을 선보이며 진정한 의미에서 세계 피겨계를 놀라게 하는 데뷔를 했다. 두 번 이상의 큰 실수가 있었던 프리 프로그램의 결과 최종 순위는 3위였지만 그해 세계선수권에서 가장 강력하고 인상적인 연기로는 김연아의 <록산느>가 손꼽혔다. 불과 2년 전 빈 경기장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열심히 카르멘을 연기하던 어린 소녀가 치명적인 팜므파탈의 카리스마로 만 삼천여 명이 넘는 관중을 압도하고 사로잡는 모습은 경이롭기까지 했다. 

솔트레이크 올림픽 이후 도입된 신체점제가 조금씩 보완되고 자리를 잡으면서 눈속임 없이 교과서대로 완벽한 점프 기술을 가진 김연아에게 유리했다.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큰 흐름에서 김연아는 자신이 목표로 한 단 하나의 꿈을 항해 퇴보나 부진 없이 꾸준히 성장했다. 이룰 수 있다면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다는 간절한 꿈, 올림픽 우승이었다. 

벤쿠버 올림픽 이전까지 김연아는 비교 불가의 실력에도 불구하고 쇼트와 프리에서 작은 실수 하나도 없는 완벽한 경기를 한 적이 없었다. 프로그램 구성 자체가 당대 최고 난이도로 끌어올린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김연아 생애 첫 클린 경기를 올림픽에서 해낸다. 유일한 금메달 경쟁자로 여겨졌던 아사다 마오가 바로 앞에서 트리플 악셀을 포함한 시즌 최고의 쇼트 프로그램을 끝내고 기립박수를 받는 모습을 입장 대기 중에 지켜보면서도 미세한 흔들림도 없던 김연아의 강철 같은 정신력은 대중들을 더욱 열광시켰다. 타인과의 경쟁을 통해 승리를 거머쥐어야 하는 스포츠 선수가 인생을 건 올림픽 무대에서 남이 무엇을 했느냐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자신이 해야 하는 일, 해낼 수 있는 일 자체에 무섭게 집중하는 그 모습은 갓 스물을 넘긴 나이에 이미 삶의 한 경지에 이른다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그 김연아조차 올림픽 이후에는 숨 고르기가 필요했다. 두 번의 세계선수권에 출전해서 2개의 은메달을 커리어에 추가했고 그때부터 그랑프리 시리즈와 사대륙 대회는 생략하게 되었다. 2013년에 선보인 <뱀파이어의 키스>와 <레미제라블>은 <죽음의 무도>와 <세헤라자데>를 연상시키는 최고의 프로그램으로 찬사를 받았고 김연아 역시 최상의 클래스가 무엇인지 보여주었다. 시간이 주는 관록과 노련한 기술이 정점에서 만난 듯 한 시즌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생에 두 번째이자 마지막인 소치 올림픽이 열린다. 김연아는 피겨 스케이터로서 마지막 시즌을 위해 손드하임의 ‘어릿광대를 보내주오’와 피아졸라의 ‘아디오스 노니노’를 선택했다. 명백한 작별 인사였다. 

그 말 많고 탈 많았던 이벤트에 대해서 길게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22회 동계 올림픽 피겨 스케이팅 종목에서 가장 기억할만한 가치가 있는 순간은 아이러니하게도 경기 밖에 있다. 김연아가 두 번째 올림픽에서 또 한 번 클린 프로그램을 마치고 키스앤크라이 존에 앉아 결과를 기다리다 마침내 자신의 순위를 확인한 순간을 상기해보자. 그저 티비로 지켜볼 뿐이었던 평범한 시청자들이나 전 세계에서 이 동계 올림픽의 하이라이트를 중계하던 해설자들도 다 함께 충격을 받고 믿기지 않아 하던 그 순간, 벤쿠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자 두 번의 세계선수권 우승자, 바로 직전 자기 인생의 마지막 경기를 끝낸 피겨 스케이터가 보여준 태도는 진정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김연아는 동요 없이 웃음 띈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객석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여왕과 같이 당당했고 그 어떤 포디움의 가장 높은 자리에서보다 고귀한 태도였다. 오랫동안 피겨여왕으로 군림해왔던 김연아는 마지막 작별을 고한 그 날, 한 때 목숨을 걸고 갈망했던 올림픽 챔피언이라는 타이틀보다, 자신이 통치해온 그 종목 자체보다 더 큰 존재가 되어있었다. 모두가 자신의 무대에 선다. 그것이 배우이든 연주자이든 운동 선수이든 평가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극히 소수의 존재만이 평가 너머의 존재가 된다. 스포츠 히어로로서 김연아가 그렇게 기억되기를 바란다. 경기장 밖의 이해관계로 얼룩진 판정의 희생자가 아니라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에서 자신의 방식으로 위대한 존재가 된 승리자.

일러스트 | 장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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