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복싱 역사상 최대의 명승부라 불리는 슈거레이 레너드 vs 토머스 헌즈의 이야기를 해보았으니, 오늘은 그 정 반대의 시합에 대해 써볼까 합니다. 복싱 역사상 가장 기괴하면서도 우스꽝스러웠던 시합, 1996년의 리딕 보우 vs 앤드류 골로타입니다.
[그 시합의 한줄요약]
이 시합은 참.......뭐라 말할 수가 없어요. 일단 둘 모두 못난 선수기는커녕 능력이 넘치는 거물들이었습니다. 리딕 보우는 전설 에반더 홀리필드를 연파한 포텐셜 덩어리였고, 골로타는 그 보우를 갖고 놀만한 기량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두 거물의 격돌은 개그로 시작해서 반칙으로 진행되다가 폭동으로 끝났습니다.
이 시합은 레너드 vs 헌즈처럼 정성들여 다룰 가치는 없습니다. 그냥 이 시합을 불멸의 존재(?)로 만든 사실들만 간략히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1. 게으른 놈 vs 이상한 놈 리딕 보우는 그 잠재력만으로만 보면 헤비급 역사에서도 손에 꼽힐 인재였습니다. 역대급의 파괴력에 스피드까지 갖춘 괴물이었어요. 타이슨도 맥을 못췄던 에반더 홀리필드와 2번 대결해 2번 모두 이겼다는 것만으로도 그 위력을 실감할 수 있겠지요. 제 생각이지만, 보우는 타이슨보다는 확실히 윗급의 선수였습니다.
[게으른 놈]
다만 문제가 있었다면, 보우는 너무 게을렀습니다. 로베르토 듀란이 과식을 즐겼다고 욕을 먹는데, 보우는 과식 정도가 아니라 그냥 먹기 위해 사는 놈이었습니다. 맨날 쳐먹고 쳐먹고 또 쳐먹다보니 시합 열흘 남았는데 스모선수처럼 부풀어있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이놈이 연습만 열심히 했다면 헤비급 역사가 바뀌었을지도 몰라요.
앤드류 골로타는 서울올림픽 동메달리스트 출신으로, 폴란드에서 건너온 복서였습니다. 보우와 대결하기 전까지 무려 28전 전승에 미친듯한 TKO 행진을 벌이던 블루칩이었지요.
[이상한 놈]
그런데 이 선수는 뭐랄까, 그냥 이상한 놈이었습니다. 일단 미국으로 건너온 이유부터가 고국 폴란드에서 폭력혐의에 연루되자 도망(!!!)쳐온 것이었고, 미국에서의 복싱 커리어중에서도 시합중에 상대를 깨물어버리는 괴기한 버릇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수아레즈?) 아무튼 규칙을 어기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지요.
이렇게 선수들도 뭔가 비비꼬인 녀석들인데, 이 시합이 성사된 배경도 코미디 냄새가 물씬 났습니다. 홀리필드를 꺾고 WBC 헤비급 타이틀을 차지한 보우는 레녹스 루이스가 의무방어전 상대로 결정되자 도망(???)치기로 결정합니다. 그런데 그냥 도망치긴 가오가 안 살았는지 챔피언 벨트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리는 해괴한 퍼포먼스를 선보이고 타이틀을 반납하죠.
[재활용도 안하고 타는 쓰레기용 봉투에 벨트를 집어넣는 사악한 보우놈]
그런데 또 웬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보우는 루이스와의 대결에 합의하고, 루이스와의 대결 전의 조정시합 상대로 떠오르는 강자(긴 하지만 보우의 입장에선 만만해보였던) 앤드류 골로타를 지목합니다. 그리고 게으름뱅이 보우는 아니나다를까 "골로타 따위를 상대로 연습할 필요도 없어"라고 떠벌이고 신나게 놀아제낀 다음 엄청나게 뒤룩뒤룩 쪄서 시합에 나타납니다. 이 모든 과정을 거쳐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복싱 역사상 가장 기괴하고 우스꽝스러웠던 시합이 펼쳐집니다.
[포스터부터 뭔가 코미디스러운 분위기가 풀풀 풍겨나옵니다]
2. 신나게 쳐맞는 보우 정작 시합의 전개는 예상외였습니다. 골로타가 보우를 일방적으로 후드려팼던 것이지요. 보우의 연습부족 때문인지 골로타의 기량이 예상 이상이었는지, 아무튼 보우의 우세를 예견한 전문가들을 비웃듯 골로타는 보우를 좌로 우로 신나게 두들겼습니다. 보우는 그로기 직전까지 몰렸습니다.
[살이나 빼고와라 쨔샤]
시합의 향방은 사실상 결정되었습니다. 이제 골로타는 경기 내내 피해다니기만 해도 판정으로 이길 것이 확실했고, 그냥 밀고들어가서 보우를 마구 때려도 KO를 이끌어낼 확률이 높았습니다. 아무튼 보우는 레녹스 루이스를 만나기도 전에 대망신을 당하게 되었고, 골로타는 헤비급 챔피언 컨텐더로서 빛나는 커리어를 열어가기 직전이었죠.
그런데, 승리를 앞둔 골로타가 뭔가 괴상한 반칙을 저지르기 시작합니다. 복싱에서도 최악의 반칙이라 불리는 급소치기, 이른바 로 블로입니다.
3. 받아라!!! 유전자 파괴 펀치!!!!
[너는 자손을 갖지 못할 것이다!!!!]
골로타의 펀치가 보우의 급소를 때렸습니다. 심판은 실수인 줄 알고 주의를 주었지요. 그런데 또 급소를 때렸습니다. 웨인 켈리 심판은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지 한번만 더 반칙하면 포인트를 깎겠다고 경고합니다. 중계진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의문을 표했습니다. 지고 있다면 모를까 압도적으로 이기고 있고, 이제 마지막까지 버티기만 해도 이기는데 왜 반칙타격을?
근데 또 급소를 때립니다.
[아이고오오오 나 죽네]
보우가 고통으로 나뒹구는 사이 켈리 심판은 경기를 중지시키고 골로타에게서 포인트를 차감했습니다. 그리고 골로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최종 경고를 날렸습니다. "한번만 더 그러면 반칙패야!!!! 알겠나?" 골로타는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리고 어쨌냐고요? 어쩌긴 뭘 어째요. 또 급소를 때렸죠.
[아몰랑!!! 심판이 뭐라고 떠들었지만 아무튼 유전자 파괴 펀치!!!!! (2)]
헤비급의 전력을 실은 펀치가 급소에 작렬하자 보우는 혼절해버렸고, 격노한 심판은 즉각 골로타의 실격패를 선언했습니다. 골로타는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애통하다는 표정을 지었는데 뭐가 애통했는지는 아직도 모를 일입니다.
4. 폭동 발발 그런데 이 시합의 기괴함은 지금부터 시작이었습니다.
[기절한 보우와 골로타에게 덤벼드는 보우 진영]
심판이 실격패를 선언하는 와중에, 미칠듯이 분노한 보우 진영의 스태프들은 링 위로 올라가 골로타에게 덤벼들었습니다. 골로타와 그 스태프들도 맞서서 링에서 몸싸움을 벌이기 시작했고, 흥분한 보우와 골로타의 팬들까지 우우 하며 링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좁은 링에서 수십 명이 맞붙는 패싸움이 개시되었지요.
[혼돈!! 파괴!! 폭력!!]
싸움은 링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젠 관중석에서조차 패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매디슨 스퀘어 가든 전체가 폭력의 아수라장으로 변했습니다. 중계 테이블조차 박살이 났고, 당시 경기를 중계하던 HBO의 아나운서 짐 램플리는 해설을 맡던 조지 포먼이 막아주는 사이에 간신히 2층으로 도망칠 수 있었습니다. 경기를 관전중이던 뉴욕 시장 루돌프 줄리아니는 경호원들에 이끌려 경기장의 라커룸으로 피신해야 했습니다.
[2층으로 도망쳐 상황을 보도하는 짐 램플리와 혼돈의 매디슨 스퀘어 가든] (그 와중에 아이 씐나는 한 사람)
결국 이 사태는 뉴욕 경찰이 출동해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 진입한 후에야 진정되었습니다. 복싱 역사상 가장 기괴했다는 이 시합은 수십 명이 다치고 14명이 체포된 후에야 끝났습니다.
5. 재대결 이 해괴망칙했던 시합은 대중들의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고, 보우와 골로타 진영은 고작 5개월 뒤에 재대결을 갖기로 합의했습니다. 마침내 정신차린 보우는 맹연습에 임했고, 전성기의 몸 상태로 골로타 앞에 나타났습니다.
[이번엔 포스터에서도 진지함이 묻어나옵니다]
하지만 재대결에조차 골로타는 보우를 압도했습니다. 이번에야말로 골로타는 승리를 거머쥐고 헤비급 타이틀에 도전할 것이 분명했습니다. 자!!! 이번에야말로!!!! 가만히 있기만 해도 이길 수 있어!!!! 반칙만 안하면 돼!!!!! 그리고,
어쩌긴 뭘 어째요. 또 로 블로지.
체중을 완벽하게 실은 골로타의 3연타 어퍼가 보우의 급소에 작렬했고, 에디 코튼 심판은 당장 골로타의 실격패를 선언했습니다. 보우는 링에 쓰러져 울음을 터뜨려버렸고, 중계진은 어처구니가 없어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그냥 도망다니기만 해도 이기는데 왜! 도대체!! 어째서!!! 저 사이코자식은 보우의 급소에 꿀단지라도 숨겨놨나?
여하튼 보우와 골로타의 기묘한 2연전은 이렇게 골로타의 2연속 로블로 반칙패로 막을 내렸습니다.
6. 후일담 리딕 보우는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미군 해병대에 입대를 선언했습니다. 농담이 아니라 실화입니다. 그런데 열흘만에 그만두고 나왔습니다.
앤드류 골로타는 원래 보우의 상대로 예정되었던 레녹스 루이스와 헤비급 타이틀전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1라운드만에 떡이 되어 KO패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