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렬한 태양 빛이 코트에 내리쬔다. 땡볕이다. 선수들은 공을 받아넘기느라 숨이 턱까지 찬다. 16강전을 치르는 한성희(KDB산업은행)는 젖 먹던 힘까지 토해내며 안간힘을 쓴다. 중노동이 따로 없다. 그런데 관중들은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 특별히 마련된 좌석에서 경기를 즐긴다. 주변엔 소나무 숲이 울창하고, 공기도 맑다. 테니스 대회 치르기는 제격이다. “코트가 아담하고 선수들이 집중하기 좋네요. 환경도 너무 좋아요.” 백승복 산업은행 코치가 싱글벙글 웃는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 두번째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삼릉 인근 농협대학교 코트(하드코트 4개 면)에서 열리는 ‘엔에이치(NH)농협은행 고양 국제여자챌린저대회’. 기존 시립코트 등 공설코트를 벗어나 대학 캠퍼스 안에서 열리는 만큼 매우 이색적이다. 총상금 2만5000달러의 대회이지만, 영국·이탈리아·독일·멕시코·호주·미국·이스라엘·대만·타이·홍콩 등 외국은 물론, 국내에서 세계 상위 랭커 진입을 노리는 선수들이 출전해 우승 경쟁이 뜨겁다.
“여자프로테니스(WTA) 정규투어보다 등급이 아래인 챌린저 대회이지만, 이런 대회를 통해 세계 200~300위권 선수들이 랭킹포인트를 쌓고 세계 100위권대에 진입하는 발판을 마련하는 겁니다. 주니어 등 국내 유망주에게는 세계 무대 도약을 위한 중요한 도전 무대가 되는 셈이고요.” 올해로 10년째 이 대회 ‘토너먼트 디렉터’(대회를 총관장하는 사람·TD)를 맡고 있는 박용국(52) 엔에이치 농협은행 여자테니스 감독은 이렇게 대회 의미를 부여한다.
이 대회에서 우승하면 랭킹포인트 50점을 얻게 된다. 그랜드슬램대회 우승(2000점)에는 크게 못 미친다. 그러나 국내 선수들은 굳이 큰 비용을 들여 해외투어에 나가지 않고도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게 된다. “정규투어급 대회로 나가기 위한 디딤돌”인 셈이다. 국내 강자 한나래는 지난주 인천여자국제챌린저대회 단식에서 우승해 28일 개막하는 2017 프랑스오픈 예선 출전자격을 얻었다.
1997년 농협은행 코치로 출발해 2007년 홍청영 감독의 바통을 이어받은 박용국 감독은 이듬해 몸소 챌린저대회보다 등급이 낮은 국제테니스연맹(ITF) ‘서킷대회’(총상금 1만달러)를 만들었다. 고양시 성사시립코트에서 개최된 이 대회는 척박한 한국 여자테니스 현실에 단비 노릇을 해왔다. “제가 고양중학교에서 테니스를 배웠는데, 지도자로서 다시 고양시에 돌아왔어요. 그래서 이곳에서 테니스 발전을 위해 서킷대회를 만들게 된 겁니다.” 서킷대회는 2009년부터는 총상금 2만5000만달러 규모의 챌린저대회로 승격됐다. 김나리, 이소라, 한나래 등 현재 여자테니스 간판들이 이 대회 우승을 통해 랭킹포인트를 쌓는 등 국제경쟁력을 키워왔다.
박용국 감독은 방송해설자로서도 팬들과 친숙하다. <스포티브이>(SPOTV)에서 여자테니스 정규투어 고정 해설자로 활동하고 있고, 4대 그랜드슬램대회 때는 <제이티비시>(JTBC) 해설위원으로 나서고 있다. 선수 시절 대우중공업 소속이었는데, 이때 전영대·전창대·김봉수·유진선 등이 3~6년 선배들었고 이들은 한국 남자 실업테니스의 한 시대를 풍미했다. 대한테니스협회 경기이사, 실업테니스연맹 전무이사 등을 역임한 박 감독은 김동현 코치와 함께 이예라·홍현희 등을 조련해 최근 몇년 동안 농협은행을 실업여자테니스 최강으로 군림시켰다.
농협은행 챌린저대회는 대회 도중 토요일에는 어린아이들을 대상으로 테니스의 맛을 알게 해주는 ‘매직테니스 강습회’도 여는가 하면, 대회 마지막날에는 고양시 지역 동호인들을 대상으로 ‘원 포인트 레슨’도 진행하는 등 사회공헌 활동에도 적극적이다. 박 감독은 “이게 농협은행이 지향하는 사회공헌 활동”이라고 했다. “앞으로 회사에서 우리 대회를 5만달러 대회로 격상시켜주면 좋겠습니다. 궁극적으로는 명실상부한 정규 투어가 됐으면 더 좋겠고요.” 그의 바람이 이뤄지는 날, 한국 여자테니스도 더욱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