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 정치 소설
<범인(犯人)>
이 소설은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하였으나 모든 등장인물 및 단체는 작가가 창작한 허구이며 현실의 인물 및 단체와는 그 어떤 관계도 없습니다.
[ 2016년 12월 9일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되었다. 그리고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에서 재판관 전원 일치 판결로 대통령 박근혜는 파면되었다. ]
1화 특검을 거부하는 자가 범인이다
스승의 날이자 부처님 오신 날 휴일이었던 2024년 5월 15일. 임사용은 1인 시위를 하기 위해 피켓을 들고 택시에 올랐다.
"용산 대통령실 앞으로 가주세요."
택시기사는 사용이 들고 있는 피켓을 슬쩍 보더니 말했다.
"1인 시위 하시러 가시나 봐요?"
"예."
택시는 약 10여분 간 달린 끝에 대통령실 앞에 멈췄다. 택시에서 피켓을 들고 내리는 사용을 보자 대통령실 경호원으로 보이는 검은 정장의 남자가 다가와 물었다.
"1인 시위 하러 오셨나요?"
"네"
"길 건너편에 가셔서 하시면 됩니다."
"예, 알겠습니다."
사용이 길을 건너기 위해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사이 좀 전의 경호원이 사용에게 말을 걸었다.
"어디에서 오셨어요?"
"집에서요."
사용은 일부러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경호원이 단순히 어디에서 왔는지가 궁금해서 물어봤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아마도 사용이 어떤 단체에 속해 있는 지를 물어봤을 것이다. 하지만 사용은 그 어떤 단체에도 속해 있지 않다. 이번 1인 시위는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임사용 개인의 의지로 결정하고 실행한 것이다. 이러한 경호원의 속셈을 아는 사용의 입에서 좋은 말이 나갈 리 없었다.
"아.. 예.. 그러시구나.."
사용의 퉁명스러운 대답에 머쓱해진 경호원은 웃으며 얼버무렸다. 이윽고 횡단보도의 신호가 바뀌자 사용은 길 건너편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멀어져가는 사용의 뒷모습을 보며 경호원은 어딘가로 무전을 보냈다.
"1인 시위자 한 명 이동 중. 비협조적이므로 주의바람."
사용이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1인 시위를 시작하려고 하자 또 다른 경호원 두 명이 다가와서 사용에게 이것 저것 묻기 시작했다.
"오늘 처음 나오셨어요?"
"네. 오늘 처음 나왔어요"
사용이 대답하자 다른 경호원이 재차 묻는다.
"진짜 오늘 처음 나왔어요? 이 피켓의 내용을 전에도 본 것 같아서요."
"저는 오늘 처음 나왔습니다."
"어떤 단체에서 나오신 거예요?"
"아니요, 저 개인적으로 나왔어요."
"사진 좀 찍어도 될까요? 저희도 어떤 내용으로 1인 시위를 했는지 보고를 해야 해서요."
사용은 메고 있던 가방에서 마스크를 꺼내 썼다. 이렇게 사진을 찍히는 일이 있을까봐 미리 준비한 마스크였다. 사용이 마스크를 쓰자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으려던 경호원이 말했다.
"불편하시면 안찍으셔도 돼요."
"찍으세요."
어차피 얼굴은 모자와 마스크로 가렸으니 사진을 찍어도 상관이 없다는 듯이 사용이 말했다. 경호원은 사진을 찍고 나서 사용에게 물었다.
"언제까지 계실 건가요?"
"세, 네시까지는 있을 생각입니다."
이제 막 정오를 넘긴 시간이다. 기왕 나온 김에 최대한 오래 있어볼 생각이었던 사용이 말했다.
"예, 알겠습니다. 그럼 저흰 이만 가볼게요."
"예, 수고하세요."
두 경호원이 자리를 떠난 지 10여분이나 지났을까? 이번에는 검은 정장이 아닌 평상복 차림의 남자 두 명이 사용에게 다가왔다.
"용산경찰서 경비과에서 나왔습니다. 성함하고 나이가 어떻게 되십니까?"
"그건 왜 물어보시는데요?"
경찰이면 다짜고짜 이렇게 이름과 나이를 물어도 되는 것인가? 불심검문은 불응해도 된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던 사용은 기분이 나빠서 순순히 대답해 줄 마음이 없었다.
"아니, 저희도 무슨 목적으로 오셨는지 보고를 해야 해서요. 대충이라도 알려주시면 안될까요?"
사용이 강경하게 대응하자 경찰관은 부탁 좀 하자는 어조로 사용을 회유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용은 여전히 강경하게 말했다.
"보시다시피 1인 시위 하러 왔고요. 1인 시위 하는데 내가 이름 나이 다 밝히고 해야 합니까?"
"말씀하시기 싫으시면 안하셔도 됩니다."
"그럼 안할게요."
사용이 단호하게 대답하자 경찰관들은 사용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다.
"X발, X나 춥네."
5월 중순답지 않은 유난히 추운 날씨였다. 외투도 없이 얇은 반팔 티셔츠 하나만 입고 나온 것을 후회하며 사용은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대통령 하나 잘 못 뽑는 바람에 이게 무슨 고생인가 싶었다.
그러나 2016년 겨울, 엄동설한의 날씨에도 촛불을 밝혔던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이정도 추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오히려 당시에 함께 촛불을 들지 못했던 미안함에, 그리고 그동안 정치에 무관심했던 부끄러움에 오히려 가슴이 더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사용은 자신이 들고 있는 피켓을 내려다 보았다. '특검을 거부하는 자가 범인이다' 과거 윤성열 대통령이 대통령 후보시절 했다는 말이 피켓에 적혀 있었다. 그리고 현재 윤성열 대통령은 특검을 거부하고 있다. 과거의 윤성열과 현재의 윤성열이 싸우고 있는 우스운 모양새이다.
언론에서는 연일 최상병 사망사건의 수사외압 의혹에 대해서 보도하고 있다. 그리고 지난 5월 2일 국회 본회의에서 여당인 국민의 혐 의원들이 모두 퇴장한 가운데 야당의원들만의 투표로 재석 168명 중 168명 전원 동의로 속칭 '최상병 특검법'이 통과되었다. 그러나 정부와 여당에서는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예고했고 사용은 이에 항의하고자 1인 시위에 나오게 된 것이다.
사용은 원래 이렇게 정치적인 행동을 나서서 하는 인물은 아니었다. 한 때 지금 제1야당인 더불어 민중당의 권리당원이기도 했지만 현재는 당비미납으로 권리당원에서 제명된 상태이다. 그리고 지난 대선에서 지지하던 더불어 민중당 이재영 후보가 아닌 국민의 혐 윤성열 후보가 당선되자 정치회의론자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스스로를 '굥황장애' 환자라고 칭하며 지난 2년 간 뉴스와 정치를 멀리했다.
그러다가 지난 4월에 치러진 총선에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1번을 찍고 나온 사용에게 현타가 찾아왔다.
'내가 평소 그토록 혐오하던 2찍과 내가 다른 점이 무엇인가? 단지 찍은 번호만 다르고 행태는 똑같지 않은가? 나는 이제 2찍을 욕할 자격이 없다.'
이런 생각에 부끄러움을 느낀 사용은 이제라도 올바른 판단을 위해서 다시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겠다고 다짐하고 그동안 보지 않았던 뉴스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총선은 범야권의 승리로 끝났지만 제22대 국회가 난항을 겪을 것이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야권에서는 여러 특검법을 통해서 정부와 여당을 압박할 것이고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면 여당은 이를 부결시키는 방식으로 막을 것이 뻔했다.
특히 윤성열 대통령은 국민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행동했다. 말로는 총선 참패가 국민의 뜻임을 겸허히 받아들인다면서 실제 행동은 검찰인사를 통해 자신의 부인을 수사하던 검사들을 모두 교체하고 여당 국회의원들에게는 “대통령의 권한으로 (여러 특검법들을) 막을테니 소신껏 의정활동을 해달라(국회에서 부결시켜 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그 중 사용을 가장 화나게 했던 뉴스는 바로 최상병 사망사건에 관한 뉴스였다. 2023년 7월에 있었던 이 사건은 폭우가 쏟아져서 급류가 흐르는 하천에서 해병대원들이 실종자 수색작전을 하다가 당시 자대에 배치받은 지 얼마 안 된 병사가 급류에 휩쓸려 사망한 사건이었다.
이는 단순한 병사 사망사건이 아니었다. 급류가 흘러 위험한 하천에 들어가라고 명령한 사단장을 포함해 안전장치 없이 그 명령을 따른 여단장 및 대대장과 현장 지휘관 등 8명의 혐의내용을 군 수사단에서 경찰로 이첩하는 과정에서 수사외압이 일어났고 그 결과 사단장 등을 제외한 대대장 2명의 혐의만으로 축소되어 경찰에 이첩되었다.
이 과정에서 당시 수사단장이었던 박정운 대령을 항명수괴죄로 군사법원에 넘겼고 재판중에 박정운 대령이 수사외압이 있었다고 폭로해 세상에 알려지게 된 사건이다.
여야의 쟁점은 바로 수사외압을 누가 지시했느냐이다. 박정운 대령은 앞서 수사외압을 폭로하면서 'VIP(대통령)가 격노했다'라는 표현을 썼다. 따라서 소위 VIP 격노설이 세상에 알려졌고 이는 수사외압의 주체가 대통령임을 암시하는 상징이 되었다.
그리고 과거 윤성열 대통령의 후보시절 발언이었던 "특검을 거부하는 자가 범인이다"와 맞물려서 수사외압을 지시한 것은 바로 윤성열 대통령이라는 뜻으로 지금 사용이 들고있는 피켓에 사용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