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민주주의, 윤석열 가치동맹의 위선과 배신

시사

미국 민주주의, 윤석열 가치동맹의 위선과 배신

쉬는차에 0 113 2023.05.08 14:24

서양사를 공부했지만 최근 들어 평생 공부했던 공부가 결국은 미국과 서방의 우월성을 주장하기위한 선전선동에 불과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우리가 부러워했던 서구의 부유함이란 실상 아시아와 중남미 그리고 아프리카를 착취했던 제국주의의 결과물이라는 것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문제는 미국과 서구사회가 지고지선의 정치체제라고 주장하고 있는 민주주의도 결과적으로는 미국과 서구의 제국주의를 가리기 위한 위장에 불과하다는것이다. 

민주주의의 탄생과정을 보면 그것이 그리 이상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에서는 그리스 민주주의가 지니고 있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페르시아를 건국한 다리우스와 그 동료들이 ‘전제정’을 채택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렇게 보면 당시의 페르시아는 전제정을 민주정보다 더 발전된 정치체제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동안 완전하게 잊혀져 있던 민주주의가 역사의 전면에 나오게 된 것은 프랑스 혁명 때문이다. 프랑스 혁명의 과정에서 부르주아지와 상귈로뜨는 절대왕정의 구체제를 전복하고 대체하기 위해 민주주의를 채택한 것이다. 프랑스 혁명에서 민주주의란 본질적으로 상퀼로뜨 민주주의, 자코뱅 민주주의를 의미한다. 절대왕정을 전복하기 위해 부르주아지와 상퀼로뜨가 연합을 했다. 부르주아지는 돈이 있었고 상퀼로뜨는 인민의 머리수가 있었다.  

결국 부르주아지가 자코뱅 민주주의를 수용하는 과정이 프랑스 혁명의 시작이고 자코뱅들이 혁명의 결과물에서 배제되는 과정이 프랑스 혁명의 종말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프랑스 혁명은 미완의 혁명이라고 하겠다. 문제는 이과정에서 부르주아지들이 민주주의를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유용한 수단으로 활용했다는 점이다. 부르주아지들은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자본을 극대화시키는 도구로 이용했을 뿐이다.  

실제로 부르주아지들에게 가장 최적화된 정치제제는 파시즘이 아닌가한다. 부르주아지들은 파시즘을 가장 선호하지만 이를 위장하기 위해 민주주의로 분칠을 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프랑스 혁명이후 지금까지 자본주의 세계에서 인민들이 정치의 주도권을 장악한 적은 거의 없다. 자코뱅주의를 구현하고자 했던 볼세비키 혁명도 결국은 실패했다. 민주주의는 부르주아지들의 이익을 보호하고 지키기 위한 가장 유용한 수단이 되었다. 부르주아지들의 적은 누구일까? 절대왕정이 무너진 이후 그것은 명백하게도 상퀼로뜨였다.  

민주주의는 상퀼로뜨를 분열시키고 무력화시키는 가장 좋은 수단이자 방법으로 채택된 것이다. 민주주의가 가장 발전한 미국의 민주주의는 프랑스 보다 훨씬 더 부르주아지의 이익을 위한 도구로 더 잘 활용되었다. 영미의 혁명에서 상퀼로뜨와 같은 인민의 역할을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유럽의 민주주의와 영미의 민주주의는 그 출발점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영미의 민주주의는 프랑스 혁명의 민주주의보다 훨씬 부르주아지 이익 보호에 최적화되어 있다. 미국의 정치제도와 체제는 부르주아지의 이익을 최대한 보장하고 책임은 회피하기 위해 설계되었다. 그리하여 현재 미국의 50명 부호가 미국 전체부의 50%를 차지하고 미국인의 50%가 전체부의 1%도 차지하지 못하는 결과가 된 것이다. 즉 미국의 민주주의란 부자를 더욱 더 부자로 만드는데 최적화할 수 있도록 설계된 것이다. 

미국이 전세계에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외국에 민주주의적 정치제도를 이식하여 그 나라의 부를 착취하기 위한 방법의 일환이라는 가설은 매우 타당하다. 미국이 자국의 인권이 거의 최하수준임에도 불구하고 타국의 인권문제를 요구하는 것도 결국은 그것이 미국 부르주아지의 이익확대와 착취를 위한 방안이기 때문일 것이다.  

만일 민주주의가 이상적인 모습으로 구현되려면 그것은 부르주아지들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한 위장이 아니라 프랑스 혁명 당시 출현했던 자코뱅적 민주주의가 되어야 할 것이다. 문제는 그런 자코뱅적 민주주의도 성공하지 못했다. 러시아 혁명이후 소련의 실패는 자코뱅적 민주주의도 결국은 한계에 봉착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정치체제와 제도에는 이상적이고 최상의 형태는 존재하지 않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때가 많다. 동양에서 최고의 정치는 요순시대였다. 동양에서 최고의 정치형태는 정치제도가 아니라 정치인의 자질에 달려 있다고 본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성공한 것 같지는 않다. 조선시대 내내 왕세자들에게 엄청난 공부를 시키고 자질을 높이기위해 노력했지만 조선은 존속했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없지 않나 한다.  

결국 정치제도와 체제의 본질은 분명하다. 민주주의니 왕정이니 전제정이니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체제가 어떤 국가가 인민의 삶을 고양하는데 성공했는가 하는 것이다. 서양의 민주주의가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제국주의적 착취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미국과 서양이 제국주의적 착취를 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그들이 말하는 민주주의를 꽃피울 수 있을까? 우크라이나 전쟁이후 벌어지는 미국과 서구의 모습을 보면 그렇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아무리 말로는 그럴듯해도 제대로된 기능과 역할을 하지 못하면 하무런 의미가 없다. 꿩잡는 것이 매다. 매처럼 생겼는데 꿩을 잡지 못하면 매가 아니라는 말이다. 어떤 정치체제든 인민의 삶을 고양하는데 유용하면 그것이 더 좋은 정치체제 아닐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전제정이 답이란 말이 아니다. 어떤 정치체제건 인민들이 싸워서 쟁취한 역사의 전리품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정치적 자유와 인권이 무시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미국이 민주주의를 주장할때 마다 그들은 과연 민주주의 국가인가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윤석열이 미국과의 가치동맹을 이야기할 때마다 그가 미국 금융자본의 앞잡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윤석열은 이번 한미정상회담을 통해 한국 자본가들의 이익과 한국 대중의 이익을 전면적으로 배반했다. 그런 석열이 더 이상 가치동맹을 언급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다.  

미국이 주장하는 민주주의가 다른 국가들을 착취하기 위한 위장된 제국주의적 술책이라면, 윤석열의 가치동맹은 미국의 위장된 제국주의에 항복하고 통채로 나라를 갖다 바치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윤석열이 주장하는 가치동맹은 대한민국에 대한 배신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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