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의 연설 전문 (2022.2.21)

시사

푸틴의 연설 전문 (2022.2.21)

分福茶釜 0 67,266 2023.06.18 11:45

우리가 접하는 우크라이나 관련 뉴스 대부분은 미국과 나토의 입장을 대변하는 기사입니다

러시아도 나름대로의 입장과 논리가 있을텐데, 그들은 과연 어떤 자세와 관점을 갖고 있는지 푸틴의 연설을 통해 알아봤으면 해서 퍼 왔습니다

 

존경하는 러시아 국민 여러분! 소중한 친구 여러분!

오늘 말씀드릴 주제는 우크라이나 사태와 그것이 우리 러시아에 왜 중요한 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물론, 이것은 우크라이나에 있는 우리 동포들에게도 전하는 말입니다.

길고 자세히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매우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돈바스 상황은 또다시 중대하고 위급한 국면을 맞이했습니다. 그래서 현재 상황을 평가하고, 이와 관련한 우리의 결정과 가능한 향후 조치들에 대해 알리기 위해 오늘 여러분께 직접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리에게 우크라이나는 단순한 이웃 국가가 아닙니다. 우크라이나는 우리의 역사, 문화, 정신적 공간의 뗄레야 뗄 수 없는 한 부분입니다. 우크라이나는 가까운 친구이고, 그 중에는 동료와 친구 뿐 아니라 친척이나 혈연관계의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로부터 남서쪽의 역사 속 고대 러시아 땅의 사람들은 스스로를 러시아인이자 정교회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땅의 일부가 러시아에 재통합되었던 17세기 이전에도 그랬고, 그 이후에도 그랬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에 대해 알고 있고, 이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이해하고, 러시아의 행동의 동기와 목표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지난 역사에 대해 짧게나마 이야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현대의 우크라이나는 전적으로 러시아에 의해, 더 정확히 말하자면, 볼셰비키의 공산주의 러시아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에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이 과정은 사실상 1917년 혁명 직후부터 시작되었는데, 레닌과 그의 동지들은 이 일을 러시아에 몹시 무례한 방식으로 했습니다. 러시아 고유의 역사적 영토를 러시아로부터 분리, 강탈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 곳에 살고 있었던 수백만의 사람들의 의견은, 당연히, 아무도 묻지 않았습니다.

이후 대조국전쟁 전후로 스탈린은 과거 폴란드, 루마니아, 헝가리 영토였던 일부 땅을 소련에 편입시킨 뒤 우크라이나에 이전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일종의 보상으로 스탈린은 옛 독일 영토의 일부를 폴란드에 분할했고, 1954년 흐루쇼프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러시아에서 크림반도를 떼어 마찬가지로 우크라이나에 선물했습니다. 바로 그렇게 우크라이나 소비에트의 영토가 형성되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제가 주목하고자 하는 부분은 바로 소련 탄생의 초기입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먼 과거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할 것 같습니다.

1917년 10월혁명과 뒤 이은 내전 이후 볼셰비키는 새로운 국가 건설에 착수했고, 그들 간에는 첨예한 이견이 발생했습니다. 1922년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 및 민족인민위원을 겸임했던 스탈린은 자치제의 원칙 하에서 국가를 건설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즉 미래의 행정지역 단위로서의 공화국들이 단일 국가에 속하되 각 공화국에 폭넓은 권한을 부여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레닌은 이 계획을 혹평했고, 당시 그가 «독립주의자»들이라고 불렀던 민족주의자들에게 양보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레닌의 바로 이러한 연합 국가 체제 아이디어와 분리에 가까운 민족 자결주의의 표어가 소련의 기초를 형성했습니다. 이것은 먼저 1922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수립 선언문에, 그 이후, 레닌의 사후, 1924년 소련 헌법에도 명시되었습니다.

여기서 곧바로 많은 질문이 생깁니다. 그 중 첫 번째 주된 질문은 옛 제국의 변두리에서 끝도 없이 커지는 민족주의자들의 모든 욕망을 관대하게 채워주어야 했던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새로 만들어진, 더군다나 대부분이 임의로 형성된 행정 단위인 연방 공화국들에 그들과 전혀 관계없는 거대한 영토를 넘겨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역사적으로 러시아인인 주민들까지도 함께 말입니다.

더욱이 이 행정 단위에 민족 국가의 지위와 형태를 부여했습니다. 여기서 또 질문이 생깁니다. 가장 열렬한 민족주의자들조차 한 번도 꿈꾸지 못했던 그런 후한 선물을 주고, 공화국들이 아무런 조건 없이 단일 국가에서 탈퇴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언뜻 보면 이것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하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 이유를 설명해드리겠습니다. 혁명 이후 볼셰비키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권력을 놓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말입니다. 이를 위해 볼셰비키는 뭐든 했습니다. 독일 제국과 그 동맹국들이 군사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을 겪고 있고, 1차 세계대전의 결말도 사실상 예고되었던 상황에서 굴욕적인 브레스트 평화 조약을 맺었고, 국내 민족주의자들의 모든 요구와 희망을 들어주었습니다.

러시아와 러시아 민족들의 역사적 운명이라는 관점에서 레닌의 국가 건설 원칙들은 단순한 과오 정도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나쁜 것이었습니다. 1991년 소련이 붕괴한 뒤 이것은 매우 명백해졌습니다.

물론 과거의 사건을 바꿀 수는 없지만, 우리는 적어도 어떤 정치적 색채도 조건도 없이 그것에 대해 제대로 그리고 정직하게 이야기해야 합니다. 제가 덧붙일 수 있는 유일한 말은, 지금 이 정치적 고려들이 특정 순간에는 아무리 효과적이고 유리한 것처럼 보였을지라도, 그 어떠한 경우에도 국가 형성의 기본 원칙이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저는 누구를 혹은 그가 한 일을 비난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시 내전 전후 국내 상황은 몹시 복잡하고 위급했습니다. 저는 단지 그런 일들이 있었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그렇게 볼셰비키의 정책 결과로 우크라이나 소비에트가 생겨났고, 지금도 이 나라를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의 우크라이나»라고 부를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레닌은 우크라이나의 작가이자 건축가입니다. 이것은 돈바스를 우크라이나에 말 그대로 끼워 넣은 레닌의 무리한 지시들을 포함한 오랜 문서들이 정확히 확인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감사해야 할 후손들이» 우크라이나에서 레닌 동상들을 철거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것을 탈공산화라고 부릅니다.

탈공산화를 원하십니까? 글쎄요, 그건 우리에게도 아주 좋습니다. 하지만 중간에 멈출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우크라이나에게 진정한 탈공산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여러분께 보여드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문제의 역사로 돌아가서 다시 말씀드리자면, 1922년 옛 러시아 제국의 자리에 소련이 수립되었습니다. 하지만 삶은 그렇게 광활하고 복잡한 영토를 보전하는 것도, 제안처럼 무정형인, 사실상 연합의 형태로 영토를 운영하는 것도 결코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곧바로 보여주었습니다. 그것들은 현실적으로도, 역사적 전통에서도 완전히 동떨어진 것이었습니다.

붉은 테러와 스탈린 독재 체제로의 급속한 이행,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지배와 공산당의 권력 독점, 국영화와 계획 경제 시스템 – 이 모든 것들이 선언되었으나 작동하지 않는 국가 체제 원칙을 공허한 선언이자 빈껍데기로 바꾸었습니다. 현실에서 연맹 공화국들은 결국 어떠한 주권도 얻지 못했고, 그런 것은 사실상 없었습니다. 실제로는 완전히 중앙집권화된, 절대적으로 일원화된 성격의 국가가 만들어졌습니다.

스탈린은 레닌과 다른, 자기 자신의 국가 체제 구상을 완전히 구현했습니다. 하지만 그에 따른 개헌이나 법률 개정을 하지 않았고, 레닌이 주창한 소련 건설의 원칙을 형식상 수정하지 않았습니다. 생각해보면 그럴 필요성도 없었을 겁니다. 전체주의 체제에서는 모든 것이 결국엔 작동했고, 겉보기에는 아름답고, 매력적이고, 심지어 초민주적으로 보였습니다.

우리나라 건설의 기초가 된 기본적인 법적 토대에서 불쾌하고 비현실적인, 혁명이 몰고 왔으나 모든 정상적인 국가에는 몹시 파괴적인 공상들이 제때 삭제되지 않았다는 것이 너무나도 안타깝습니다. 이전에 자주 그랬던 것처럼 미래에 대해서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공산당 지도부는 그들이 견고한 운영 시스템을 만들었고, 자신의 정책이 민족 문제도 최종적으로 해결했다고 확신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위조, 개념의 대체, 여론 조작, 기만의 대가는 컸습니다. 민족주의적 야망의 균은 사라지지 않았고, 민족주의 전염병으로부터 국가를 지키는 면역력을 갉아먹는 지뢰는 처음부터 심어진 채 터질 때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 지뢰는 소련에서 탈퇴할 수 있는 권리였습니다.

1980년대 중반 사회경제적 문제가 커지고 계획 경제의 명백한 위기가 드러나는 상황에서 민족 문제는 갈수록 첨예해졌는데, 그 핵심은 소련 민족들의 기대와 숙원이 아닌, 지역 엘리트들의 커지는 야망이었습니다.

하지만 소련 공산당 지도부는 상황을 심층 분석하고 경제와 정치 시스템, 국가 체제의 점진적이고 신중한 변환을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대신 레닌의 민족 자결주의의 복귀라는 노골적인 빈말만 늘어놓았습니다.

게다가 공산당 내부의 권력다툼 과정에서 각 측은 지지층을 늘리기 위해 민족주의적 감정을 무작정 자극하고, 부추기고, 자신의 잠재적 지지자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약속하며 그들을 이용했습니다. 시장경제 혹은 계획경제 위에 세워진 빛나는 미래와 민주주의 대한 피상적이고 포퓰리즘적인 말들 가운데, 그러나 국민들은 실질적으로 빈곤해지고 모든 것이 결핍된 상황에서 주권당국의 그 누구도 국가가 처할 필연적이고 비극적인 결말에 대해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소련 여명기에 자기 당 대열에서 성장한 민족주의 엘리트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길을 갔고, 이 과정에서 소련 공산당에게는, 다행히도, 국가 테러, 스탈린식 독재와 같이 권력과 국가 자체를 유지할 수단이 더 이상 없다는 것을 망각했습니다. 당의 관리 기능마저도 그들의 눈앞에서 아침 안개처럼 흔적 없이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도 말입니다.

그리고 1989년 9월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이른바 당의 현대적인 민족 정책, 소련공산당 강령이라고 불리는 비운의 문서가 채택되었습니다. 이 문서는 다음과 같은 조항을 담고 있습니다. 인용해보겠습니다. «연방 공화국은 그들의 사회주의 주권국가의 지위에 부합하는 모든 권리를 갖는다.»

이런 조항도 있습니다. «연맹 공화국의 최고 대표 기관들은 공화국 영토 내에서 연방정부의 결정과 명령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중단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각 연방 공화국은 공화국의 모든 주민에 적용되는 고유한 시민권을 갖는다.»

이러한 입안과 결정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분명하지 않습니까?

지금은 국가적 혹은 헌법적 권리의 문제를 파고들고, 시민권이라는 개념 가체를 정의하는 자리도 아니고, 그럴 때도 아닙니다. 하지만 여전히 궁금증은 생깁니다. 안 그래도 어려웠던 상황에서 왜 그런 식으로 나라를 더 흔들 필요가 있었을까? 사실은 사실로 남아 있습니다.

소련 붕괴 2년 전부터 소련의 운명은 사실상 예견되었습니다. 급진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 그 중 누구보다도 우크라이나에 있는 급진주의자와 민족주의자들은 독립을 쟁취한 공로를 스스로에게 돌립니다. 하지만 우리가 본 것처럼,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단일한 국가를 붕괴로 이끈 것은 서로 다른 시기에 국가 건설, 경제 및 민족 정책에 참여했던 볼셰비키 리더들, 소련 공산당 지도부의 역사적, 전략적 과오였습니다. 소련이라는 이름의 역사 속 러시아의 붕괴는 그들의 책임이었습니다.


이 모든 부정, 기만, 러시아가 당한 노골적인 강도행위에도 불구하고 우리 민족은 소련 붕괴 이후 발생한 새로운 지정학적 현실을 인식하고 새로운 독립 국가들을 인정했습니다. 인정한 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도 당시 어려운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CIS 파트너 국가들을 도왔고, 그 중에는 독립을 선포한 직후부터 수없이 많은 물질적 지원을 요청했던 우크라이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우크라이나의 존엄과 주권을 존중하며 그러한 지원을 제공했습니다.

우리의 에너지 가격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제공한 연성차관, 경제 및 무역 혜택의 규모를 단순 계산한 전문가 추정에 따르면, 1991년부터 2013년까지의 기간 동안 우크라이나의 예산상 총 이익은 2500억 달러 가량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1991년 말 외국과 국제기금에 대한 소련의 부채는 약 1000억 달러에 달했습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구소련의 모든 공화국들이 경제 잠재력에 비례하여 이 부채를 함께 상환할 것으로 예상됐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가 소비에트 부채 상환을 떠맡게 되었고 그것을 전부 청산했습니다. 최종적으로 부채를 청산한 것이 2017년입니다.

그 대신 새로운 독립 국가들은 구소련의 해외 자산 중 자신의 몫을 포기해야 했고, 이에 관한 협정이 1994년 12월 우크라이나와 체결되었습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는 이 협정을 비준하지 않았고 이후 다이아몬드 펀드, 금 매장량, 구소련의 해외 재산 및 기타 자산들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며 협정 이행을 거부해버렸습니다.

그러나 이런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항상 개방적이고, 정직하게, 그리고 우크라이나의 이익을 존중하며 우크라이나와 협력했고, 양국 관계는 여러 분야에서 발전했습니다. 그리고 2011년 양국 교역액은 500억 달러를 넘어섰습니다. 주목할 점은 아직 팬데믹 이전이었던 2019년 우크라이나와 모든 EU국가들의 교역액을 전부 합쳐도 여기에 미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우크라이나 정부는 러시아와의 관계에서 모든 권리와 이점을 가지면서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으려는 것이 눈에 보였습니다.

파트너십이라기 보다는 부양에 가까웠고, 우크라이나 당국은 때때로 몹시 예의 없이 이를 요구했습니다. 에너지 수송과 관련한 끝없는 협박과 저속한 가스 도난만 봐도 그렇습니다.

덧붙이자면,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의 대화를 서방과의 거래를 위한 구실로 이용했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이 커질 것이라며 러시아와의 관계를 가지고 서방을 협박했습니다.

여기서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우크라이나는 첫 단계부터 우리를 묶어주는 모든 것을 부정함으로써 국가를 세우기 시작했고, 우크라이나에 살고 있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 모든 세대들의 인식과 역사적 기억을 왜곡하려고 했습니다. 우크라이나 사회가 극단적인 민족주의의 확산에 부딪치고, 그것이 급격하게 폭력적인 루소포비아와 네오나치즘의 형태를 띠게 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과 네오나치들이 북캅카스에서 테러 집단에 합류하고 러시아에 대한 영토 주장의 소리가 더 커지기 시작한 것이 바로 여기서 부터입니다.

비영리재단과 정보기관의 네트워크를 이용하여 우크라이나에 자신의 고객을 늘리고 그 대표들을 권력층으로 진출시켜온 외부 세력들도 자신의 역할을 했습니다.

실제로 우크라이나는 진정한 국가성이라는 안정적인 전통을 가져본 적이 없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1991년부터 우크라이나는 역사적으로도, 우크라이나 현실에서도 동떨어진 남의 모델을 기계적으로 베껴왔습니다. 국가 정치 기관들은 순식간에 만들어진 일가와 우크라이나 민족의 이익과는 전혀 다른 그들만의 탐욕스러운 이익에 맞게 계속해서 재단되었습니다.

우크라이나 올리가르히의 이른바 친서방 문명화 선택이란 민족의 번영을 위한 더 나은 여건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러시아의 지정학적 경쟁자들에게 비굴하게 봉사하면서 올리가르히들이 우크라이나인들에게서 훔쳐서 서양의 은행 계좌에 숨겨둔 수십억 달러를 지키는 것입니다.

일부 산업금융 그룹들, 그들의 지원을 받는 정당과 정치인들은 처음부터 민족주의자들과 급진주의자들에게 의존했습니다. 다른 이들은 말로는 러시아와의 좋은 관계, 문화와 언어의 다양성에 찬성한다고 하면서 그런 의도를 진심으로 지지하는 국민들의 투표로 당선이 됐고 그 중에는 동남쪽 지역 주민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선된 후 그들은 자신의 유권자들을 배신하고, 자신이 내세운 공약을 거부하고, 급진주의자들이 말하는 대로 실제 정책을 펼치면서, 때로는 어제의 동료였던, 2개 국어 병용과 러시아와의 협력을 지지했던 사회적 조직들을 탄압했습니다. 그들을 지지했던 사람들은 대체로 준법시민이고, 온건한 시각을 갖고 있고, 정부를 신뢰하는 것에 익숙해졌으며, 급진주의자들과 달리 공격성을 드러내거나 불법적인 수단을 이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이용했습니다.

반면 급진주의자들은 뻔뻔해졌고, 그들의 요구는 해가 갈수록 커졌습니다. 그들에게는 민족주의와 부패라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민족의 진정한 문화적, 경제적, 사회적 이익과 우크라이나의 실질적 주권을 민족주의적 토양의 투기와 외적인 민족학적 특성으로 교묘히 바꿔치기한 나약한 권력기관에 자신들의 의지를 강요하는 것이 갈수록 쉽게 여겨졌습니다.

우크라이나에서 안정적인 국가성은 결국 발전하지 못했고, 정치적 절차와 투표는 그저 여러 올리가르히 일가들 간의 권력과 재산 재분배를 가리기 위한 가림막 역할을 할 뿐입니다.

러시아를 포함한 많은 국가들에 있어 의심의 여지없이 도전이자 문제점인 부정부패가 우크라이나에서는 특별한 성격을 띠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우크라이나의 국가성과 모든 시스템, 삼권분립 전체에 침투하여 그것을 좀먹었습니다. 급진주의자들은 사람들의 정당한 불만을 이용했고, 시위를 이용하여 2014년에는 마이단을 쿠데타로 끌고 갔습니다. 동시에 그들은 외국 정부의 직접적인 조력을 받았습니다. 자료에 따르면, 키예프 독립광장의 이른바 저항세력이 미 대사관으로부터 받은 물질적 지원이 하루 100만 달러였습니다. 그밖에도 매우 큰 액수의 돈이 버젓이 반대파 리더들의 계좌로 직접 이체되었습니다. 그 액수가 수천만 달러에 이릅니다. 그런데 키예프와 다른 도시들의 거리와 광장에서 벌어진 충돌 과정에서 사망한 사람들의 유가족과 부상자들이 실제로 받은 금액은 총 얼마입니까? 이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권력을 장악한 급진주의자들은 반헌법적 행위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추적하고, 그야말로 테러를 자행했습니다. 정치인, 언론인, 사회적 인사들을 조롱했고, 그들을 공개적으로 모욕했습니다. 학살과 폭력, 세간을 시끄럽게 하지만 아무 처벌도 없는 살인의 물결이 우크라이나 도시들을 덮쳤습니다. 평화적 반대시위 참석자들이 도륙당하고 노동조합의 집에서 산채로 타 죽었던 오데사의 끔찍한 비극을 떠올리면 절로 몸서리가 쳐집니다. 이런 만행을 저지른 범죄자들은 처벌받지 않았고, 아무도 그들을 찾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 한 명 한 명을 알고 있고 그들을 처벌하고, 찾아서 재판에 넘기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마이단은 우크라이나를 민주주의와 진보에 더 가깝게 만들지 못했습니다. 쿠테타를 일으킨 후 민족주의자들과 그들을 지원했던 정치 세력들은 상황을 완전히 교착상태로 끌고 갔고, 우크라이나를 내전이라는 나락에 빠뜨렸습니다. 그 사건이 있고 8년 후 우크라이나는 분열되었습니다. 우크라이나는 심각한 사회경제적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여러 국제기구에 따르면, 2019년 생산가능인구가 아니라 우크라이나 전체 인구의 15%에 달하는 약 600만 명의 우크라이나인들이 일자리를 찾아 해외로 떠나야 했습니다. 대부분 일용직 비숙련 일자리를 찾아갔습니다. 2020년부터 팬데믹 기간 동안 우크라이나를 떠난 의사와 기타 의료진의 수가 6만 명을 넘는다는 사실도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2014년부터 수도요금이 거의 30% 올랐고, 전기요금은 수 배, 가정용 가스 요금은 수십 배 인상됐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공공서비스 요금을 지불할 돈이 없고, 말 그대로 살아남아야 하는 상황입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겁니까?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대답은 명확합니다. 소비에트 시기와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받았던 지참금을 탕진하고 떼어먹었기 때문입니다. 러시아와의 긴밀한 협력 등으로 인해 사람들에게 안정적인 수입을 보장하고 국고에 세금을 채워주던 수만 개, 수십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졌습니다. 기계제작, 공구제작, 전자공업, 조선, 항공기 제작과 같은 분야들은 일거리가 없거나,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한때 우크라이나뿐만 아니라 소련 전체가 자랑하던 분야들인데 말입니다.

예카테리나 2세 시기에 최초의 조선소가 세워졌던 니콜라예프에서 2021년 체르노모르스키 조선소가 사라졌습니다. 유명 기업 «안토노프»는 2016년 이후 단 하나의 계열 항공기도 출시하지 않았고, 우주로켓장비 전문 생산 공장인 «유쥬마슈» 공장은 크레멘추그스키 제강소와 마찬가지로 파산 직전에 놓였습니다. 이런 가슴 아픈 사례는 이 밖에도 많습니다.

소련이 만들었던 가스수송 시스템은 가동 리스크도 크고 환경 비용도 많이 들 정도로 너무 노후화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긍금증이 생깁니다. 빈곤, 절망, 산업 및 기술적 역량의 상실 – 이것이 수년 간 무지개 빛 미래를 약속하며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우롱하고 속였던 그 친서방 문명화 선택이라는 것입니까?


실제로는 그 결과로서 우크라이나 경제의 붕괴하여 국민들에 대한 노골적 강탈을 초래하고 있고, 우크라이나는 외부의 통제 하에 놓였습니다. 외부로부터의 통제는 서방 국가들의 수도에서 전달되는 지시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 뿐 아니라, 우크라이나 내에 퍼져 있는 해외 컨설턴트, 비영리단체 등 기타 기관들의 네트워크를 통해서도 현지에서 직접적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들은 모든 중요한 인사결정, 중앙기구부터 지자체에 이르는 모든 국가기관, «나프토가즈», «우크레네르고», 우크라이나 철도, «우크로보론프롬», «우크르포치타», 우크라이나 항만청을 비롯한 주요 공기업과 공공기관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우크라이나에 독립적인 사법부는 없습니다. 서방의 요구에 따라 우크라이나 정부는 국제기구 대표들에게 고등법관회의와 판사자격위원회와 같은 최고 사법 기구의 인사 선발 우선권을 줬습니다.

그밖에도 미 대사관은 국가부패방지청, 국가반부패국, 반부패특별검찰청, 반부패고등법원을 직접적으로 통제합니다. 부패 척결의 효율성 제고라는 허울 좋은 구실 아래에서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뭐 좋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어디에 있습니까? 부패는 화려한 빛깔로, 전보다 더 크게 피어났습니다.

이러한 운영방식을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알고 있습니까? 그들의 나라가 정치적, 경제적 보호를 받지도 못할 뿐더러, 꼭두각시 체제의 식민지로 전락했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습니까? 국가 사유화는 스스로를 «애국자의 힘»이라고 칭하는 권력자들이 민족성을 상실하고 국가의 주권을 박탈당하는 방향으로 상황을 이끌어가도록 만들었습니다.

러시아 지우기와 강제적인 동화정책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최고 라다는 끊임없이 새로운 차별법들을 내놓고 있고, 소위 선주민들에 대한 법은 이미 시행 중입니다. 스스로를 러시아인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정체성, 언어, 문화를 고수하길 원하는 사람들은 우크라이나에서 외부인이라는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우크라이나어 교육 및 공용어 지정에 관한 법률들에 따라 러시아어는 학교와 모든 공공장소, 심지어 일반 가게에서도 금지되고 있습니다. 이른바 권력 «정화»에 관한 법을 이용하여 마음에 들지 않는 국가 공무원들을 정리했습니다.

우크라이나 공권력이 표현의 자유와 이견을 강력하게 억압하고, 반대세력을 추적하기 위한 근거가 되는 법안들이 수없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다른 국가, 외국의 개인과 법인에 대한 일방적이고 불법적 제재라는 슬픈 관행은 이미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크라이나는 자신의 서방 관리자들보다 한술 더 떠서 자국민과 자국 기업, 방송채널, 기타 언론과 심지어 의원들에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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