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익글 | 닥터벤데타가 말하는 의료카르텔

시사

공익글 | 닥터벤데타가 말하는 의료카르텔

Rauma 0 6,851 2023.11.17 18:48


 

 

https://youtu.be/tb8-4A4hd7M?si=AVAFu-UlpdILb-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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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4 유명 성형카페 부작용 호소 글 눈6 코3
~11/17 유명 성형카페 부작용 호소 글 눈3 코6




다음은 2018년 3월 홀연히 생을 마감하신 어느 성형외과 전문의 선생님의 글입니다.

극단적인 선택은 고인의 말씀처럼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고통 속의 삶을 이겨내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신 순간들이 글에서 읽힙니다. 

고통이 없는 곳에서 편히 영면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위로를 드리고 평안을 기원합니다.

고인이 원하신 대로, 고인이 죽음으로 남긴 이 메시지가 더 나은 사회가 만들어지는데 주춧돌의 역할을 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고인이 남긴 글 전문을 올립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이것이

 

 

내 블로그 마지막 글이다.

 

 

그저 보통의 착한 의사로 살고 싶었지만 세상은 허락해주지 않았다.

 

H병원에서 P병원으로 갑자기 운영진에 스카우트 되어 공석이 갑자기 생긴 대학병원 성형외과에 과 장으로 근무하게 되었었다. 그렇지만, 2012년 봄 나는 P병원에서 수술이 끝나고 갑자기 왼쪽 팔이 마비가 와서 응급으로 고대 구로병원에서 눈물방울처럼 터진 목 디스크 5,6번 제거 수술을 했다. 마비의 문제가 된 디스크의 일부만 제거하는 흔하지는 않은 방법의 수술이었다. 전공의 선생님은 마비가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얘기했다. 세상이 무너지는 듯했다. 성형외과 의사가 한쪽 팔이 마 비 되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수술 후 천만 다행히 3주가 지나 기적처럼 마비가 사라지고 팔이 움직였다. 마비가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단정적으로 이야기한 전공의 선생님은 이제는 환자에게 때로는 희망을 환자가 가지도록 하는 것도 의료라는 것을 이제는 알까? 하지만 수술 후 아마 6주 이상 지난 뒤부터 시간이 지나면서 저림증이  심해져서  담당 교수에게  수도 없이  찾아갔지만,  나는 저려서 숨쉬기조차 잠도 잘 수 없는데도 교수는 이상 없다고 계속 우울증 약만 처방해주었다.

 

 

나의 소속 P병원에서 디스크 수술 후 4주 정도 쉬고 목 기브스를 하고 출근을 했지만, 6주 후 목 브레이스를 풀고나서 증상이 좋지 않아 3개월을 병가를 받고자 했지만, 산재를 인정해주지도 않았고 당시 이비인후과 병원장은 내가 쓴 간곡한 병가부탁의 눈물의 편지를 보고도   "그러려면 나가지 이런 편지를 왜 나한테 보내"라고 하며 화를 내었다. 병가를 줄 수 있는 지 전체 운영진 회의가 열렸지만 그곳에서도 병원장은 홀로 나를 죄인 취급했고, 그래서 회의는 사안을 결정하지 못하고 나는 바로 사표를 썼다. 여교수에게 조차, 자주 여성에 대한 비하와 성추행의 말들이 일상이던 그 병원장은 물론 대형 대형 파티 사건으로 나중에 유야무야 병원에서 쫒겨 나게 되었지만..사실 이 대형 사건도 작은 기사로 은폐되었다.

 

 

좀비처럼 살며 6개월 모든 카이로 프랙티스, 한방, 목신경성형술 등등 해보지 않은 게 없지만 나아 지지 않았고 괴로운 날들을 보내고 자살을 몇 번이나 고민하고 계획했는지 모르겠다. 가족이 있어그 때는 그러지 못했다.

 

 

2012년 말에 다시 결국 Y대에서 신경외과 교수님에게 수술을 받았다. 디스크를 일부만 제거하여 목이 불안정해지고 그 주위로 가골이 계속 자라 신경을 자극했다고 신경외과 교수님은 진단했고 수술 소견에 적으셨다. 그럼 첫 수술이 좋지 않은 수술법이란 이야기인가? 교수님은 4,5,6번 척추를 쇠로 고정했고 내 저림 증상은 좋아져서 다시 H병원에 취직을 했었다.

 

 

이곳에서 일년이 지나 거의 회복되었지만 2013년 취직했던 H병원에서 갑자기 내가 원치 않게 그만두게 되었고, 몇 번씩 나에게 D대학병원으로 오라던 한 주임 교수의 요청으로 2014년 다른 대 학병원 교수가 되었다. 우리는 아주 좋은 사이로 한동안 지냈다.

 

 

나는 다시 사는 의사로서의 삶을 진정 환자를 위해 열심히 살고자 했다. 환자의 몸을 내 몸처럼 생 각하고 내가 아플 때를 생각해 환자 입장에서 진료를 보았다. 진료를 교묘하게 거부하는 일 없이 열심히 환자를 보았다. 다른 병원에서 치료받지 못한 욕창 환자분들도 성심과 성의로 진료했다. 한번의 죽음까지 생각했던 나였기에 다시 의사로  사는 것이 행복했고, 내일 죽을 생각으로 오늘  을 열심히 살았다.

 

 

하지만, 너무 열심히 환자를 봐서 내 진료수익이 점점 증가되자, 자신의 성을 쌓은 주임교수에게 오히려 나는 점점 경계를 받았다. 그는 모든 전공의 선생님을 독점하여 나는 회진도 혼자 돌고 내 환자분들이 점점 피해를 입게 되었다. 전공의 선생님들이 모두 그 교수에게만 집중하여, 내 환자 분들이 늘어나면서는 제때 퇴원을 못하거나 치료를 제때에 못 받는 일들이 반복해서 생겼다. 나는 수 차례 건의를 하고 1년차 선생님만이라도 병실과 응급실에 상주 시키길 문서화시켜서 두 교수에게 동의 받았지만, 여전히 응급실 환자는 수술에 들어간 1년차 선생님 때문에 응급실에서 기다려야 했고, 병동 환자들도 제때 처치나 오더가 이행 안되었다. 주임 교수의 수술과 외래에는 모든 전공의 선생님들이 옆에서 거의 늘 대기해야 했고, 나의 담당 환자분들은 결국 자주 피해를 보게 되었다.

 

 

아니 전공의 선생님들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일년차 전공의 선생님에만 많은 당직과 각종 잔 일, 수술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수술기록지를 쓰라는 등 각종 비합리적이거나 상대적으로 간단한 일

 

들을 많이 시키는, 잘못된 오랜 독박 시스템으로 전공의 선생님은 밀린 일들로 밤 10시 12시에 내 환자분들을 드레싱 하는 경우도 점점 생겨났고 잠을 못 잤고, 늘 밤에는 각종 서류작업과  응급실 콜에 시달렸다. 나는 이 독박 당직 시스템도 고쳐보고자 했지만, 서로가 오랜 전통적 불합리에 아무도 손해를 보고 싶어하지 않았다.

 

 

결국 내가 제시한 두 차례의 문서화된 그리고 그러자고 싸인까지 받은 건의(일년차는 병동과 응급 실만 담당하게 해 달라는 건의)가 이행이 안되고 내 환자들의 피해가 계속 생겨, 내가 그 교수에게 약속을 왜 안 지키시냐고 화를 한 번 내었는데 그 때부터 모든 전공의에게 내 환자를 보지 말 것을 지시했다.

 

 

입사 후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는 전공의에게 주어지는 외부 개원의 선생님이 주는 격려의 돈을 뺏거나, 논문을 쓰라고 모든 전공의를 지속적으로 괴롭혀 자신의 업적을 만들었고, 간단한 수 술에도 모든 전공의를 수술실에 데리고 들어가고 양방수술을 하는 등 빨리 빨리 수술을 원칙으로 전공의 선생님들이 옆에 많이 필요했다. 작은 공장식 운영이었다. 그가 받는 리베이트는 그의 해 외학회 여행을 위해 축적되고 매년 쓰였다.

 

 

내가 백 번 잘못한 일이고 지금도 뼈저리게 후회하는 잘못도 있다. 환자에게 성의 없게 하거나 선 배들을 무시하고, 내 당뇨족 환자의 봉합한 엄지의 신전건을 무엇인지도 모르고 잘라버리는 등, 지속적으로 너무 주의의무가 태만한 한 전공의에게 내가 화를 못 이겨 거친 말들을 하였고, 한 번 꿀밤을 주고, 한 번 드레싱 중 산소포화도가 떨어지는 기도삽관 욕창 환자 앞에서 그 전공의 선 생님이 직접 가래를 빼어주진 않고서 소리치면서 인턴 선생님을 부르고 짜증을 내었다고, 내가 정강이를 한번 살짝 걷어찼었는데, 그 이유를 들어, 그 교수는 여러 가지 문제가 많던 전공의 선생 님을 회유하여 나를 쫓아낼 구실과 계획을 세웠다.

 

 

사실 그 전공의 선생님도 시스템의 완벽한 피해자였다. 과장의 전공의 독점의 구조 속에서 전공의 선생님들도 과한 잔일과 업무, 대기, 논문 등에 시간이 없어 착취당하고, 그러니, 주임 과장의 환자가 아닌 내 환자들은 자주 봐 드릴 시간이 없었다.

 

 

아주 간단한 오더조차도 전공의 선생님은 일년 내내 제대로 이행이 안되니 아무리 내가 반복해서 설득하고, 오더의 포맷을 만들어서도 제공해주고 문제를 반복해서 지적하고 알려주고 시정하도록 이야기해도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환자의 상태에 따라 조금씩 다른 오더를 내는, 생각해서 내는 오더에 익숙하지 않은 전공의 선생님들, 그저 같은 카피 오더만 내던 교육 속에서 나의 성의는 짜증스러운 것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전공의 선생님들도 시스템의 온전한 피해자들이었고 제대로 된 기본 교육은 받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옮겨 다닌 수련 병원들에서 전공의 선생님들의 권리와 착취를 막고자 무던히 노력했었다. 외래에서 교수가 전공의 선생님에게 과하게 외래를 지키며 교육에 별 도움이 안 되는 잔일을 시키는 것을 나는 거부했고, 논문도 내가 직접 썼지 전공의 선생님께 요구하지도 않았다. 특히 H병원의 전공의 선생님들은 어느 대학병원보다 훌륭한 자질을 가진 환자분들께 최선의 성의를 다하는 선생님들이 너무 많았다.

 

 

그런데 여기의 교육이나 시스템 특히 그 왕국의 주인은 나와는 다른 생각이었다.

 

 

교수가 자신이 싫어하는 전공의 선생님을 졸업에 필요한 논문을 도와 주지 않으며 괴롭히는, 때로는 말도 안 되는 엉터리로 가득한, 도저히 논문이 안 되는 내용을 억지로 논문으로 쓰라고 요구하는 경우를 보았는데, 그도 그런 교수였다. 지속적인 논문 쓰기 요구. 그것은 교육이 아니라 자신의 연구 성과를 위한(결국은 논문에 대해 주어지는 돈) 전공의 선생님에 대한 폭력일 뿐이다.  매우 극소수의 교수들이 이런 식으로 논문으로 전공의 선생님을 착취하고 통제한다. 졸업논문이 필요하니까. 그것이 현재 전공의 선생님들의 인권이다. 별 대단하지도 않은 교수란 직책. 그것을 유지하는 시스템의 통제법이 전공의 선생님들을 착취하였다. 그것을 깨려는 내가 그 왕국에서 절대 살아남기는 힘들었고, 오히려 내가 내 화를 이기지 못하고, 너무 여유 없어서 계속된 실수를 하는 전공의 선생님에게 실수를 했다. 나는 말로 하는 오더는 잊어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도저히 안되어, 급하지 않은 오더는 전회를 하지 않고 마이피플 문자로 오더를 글자화 해서 지시를 해 보기도 오래였지만, 그 조차도 지속적으로 이행되지 못하는, 같은 루틴의 아주 간단 오더들 조차 불이행되고, 유례 없이 계속 생기는 환자의 피해와 잠재되어 점점 쌓여간 위험을 보다 못해, 나는 바보처럼 험한 말과 폭력을 쓰고 만 것이다. 나도 상황에 말려들어서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하고 말았다. 당시에는 전공의 선생님이 환자에 대한 주의의무 태만이 너무 심하고, 이렇게 게으르고 태만한- 사실은 그들은 시간이 없었지만- 이들이 전문의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까지 느낄 정도였으나, 사실 나도 전공의 선생님도 환자분들도 그 철옹성 시스템의 단지 피해자일 뿐이었다. 과한 업무에 나의 오더는 후순위였기 때문이다. 정성을 다한. 직접 봉합까지 모두 직접 하는 수술, 오래 환자분과 대화하는 회진, 하루 오전 한번 전공의 선생님과 회진, 나  혼자 오후  회진, 교수가 직접 드레싱치료를 하는 것도, 그 성에선 그렇게 해선 안 되는  일이었다. 꼭 필요한 것만 해야 하는 시스템에서 나의 과한? 환자에 대한 정성은, 그 성에서 옳은 일이 아니었고 별나게 환자에게 잘하려는 의사도 별종의 나쁜 의사가 되는 거였다.  조금만 서로 대화하고 나도 그들 도 합리적으로 바꾸면 되는 것이었는데, 그 잘못된 시스템의 피해자는 결국 전공의 선생님과 환자의 생명과 안전이었다.

 

 

나는 스스로 아파서 환자가 되고 나니, 더욱 더 아픈 이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환자에게 정성을, 내 몸처럼, 내 가족의 몸처럼 생각하고 치료했으나 그것이 그 철옹성에선 오히려 나쁜 일로 취급 되었다. 난 단지 합리적이기를 요구했지만 그 합리성은 그 성에서 왕국을 깨뜨리는 도전으로 받아들여졌고, 난 별종의사, 시스템의 부적응자일뿐이었다.

 

 

그 교수는 급기야 잔혹하게도 전혀 없던 내가 성추행을 했다는 이야기까지 가공해서 만들어내어 내가 팔이 마비가 왔던 B병원교수에게 전화하는 등 내 명예를 훼손하는 일도 했는데, 교수로서 기본 자질이 없는 사람이었다. B병원 교수의 지인이 오히려 나에게 전화해서 그 사람이 왜 그런 전  화를 하냐고 황당하다고 나에게 오히려 전화를 했다. 아마 그 외에도 가공된 나에 대한 악담을  전해 들은 대학 교수님들이 더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쳬르니세프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책을 가장 좋아하는, 절대적인 평등주의자인, 아니 여성이 남성보다 다양하고 많은 면에서 더 우월함이 있다고 믿는, 대학 내내 이른 바 운동권 학생이었던 나를, 그리 모함하는 건 너무나도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학교와 병원의 명예를 위해 나는 일체 아무 대응을 안 했다. 진실은 밝혀지리라 생각했지만, 그건 내가 대응 안 한 것이 지금 생각하면 바보 같은 일이었다.

 

 

나는 아무 말없이 거의 일년을 일년차 전공의 일부터 수술, 교수일까지 오더 챠트 수술 기록 쓰고 마취를 위한 피검사까지 모두 확인하고, 병동 간호사 콜을 받고, 경과 입원기록까지 모든 것을 직 접해야만 했다. 나는 그래도 그들이 조금이라도 나의 진심의 노력에 화해하기를 바랬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했고, 나는 대외비로 병원장님께 편지를 드려서 문제를 공식화 중재를 요청했고, 병 원의 공식 화해 권고나 주선, 나의 공식 사과도 주임과장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신의 것은 고치    지 않으려 하였고 오직 자신의 성을 지키기 위해 그저 나를 몰아내려고 했다.

 

 

그는 실제로 진료과의 장기적인 발전을 위한 일은 하지 않았고, 자신의 성을 지키기 위해 과의 연세 드신 교수님을 모시며 방패로 삼았다. 솔직히 그가 하는 미세수술은 실패가 너무 많았고, 무 조건 빨리, 성의 없는 수술을 한다고,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 했고, 환자들에게 불만과 원성도 원무 과에 접수된 경우도 많았다. 다른 과 교수들도 그 교수에게 협진하길 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급한 스타일은 사실 미세 수술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의 왕국은 그래서 더욱 오랫동안 견 고했다는 것, 아무도 그 교수 밑에 오려는 사람이 없었기에, 장애인인 나를 불렀다는 것을 나는 이제서야 깨닫게 되었다.

 

 

나는 그 시스템을 개혁하지 못했다. 그의 왕국에 도전했다는 이유로 내쳐졌고, 잘못된 전공의 교육과 착취는 올 졸업생의  전문의 시험에서도 낙방으로 증명된 듯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집안의 머리 좋은 엘리트인 그가, 전문의 시험에서 충분한 교육과 통상의 시험 준비 시간만 주어졌다면 낙방할 이유가 없다. 이 대학병원을 졸업한 성형외과 졸업생이 아무도 다시 모교로 스승을 보러 오지 않는 대학병원이란 것도 나는 예전에는 몰랐었다. 오래된 착취가 일상화된 곳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은 내가 그 시스템의 일원으로 동화되지 못한 의사이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그야 말로 합리적이고 착하게 살고자 했던 나는 별종 바보 의사일 뿐이었다.

 

 

한 개인에 대한 폭로. 이건 사실 한 개인의 대한 폭로만은 아니다. 일부 수련병원의 일상화된 악이다.

 

 

말하지 않고 생을 다하는 건 너무 억울하다. 나도 비난 받을 것이다. 내부고발자가 우리나라에서 보 호되지 못하지 않는가? 나는 많이 망설였지만, 사실 이 같은 일은 전국에서 벌어지는 곳이 있을 것이다. 과거에 나도 주위에서 보았고 들었다. 더 많은 전공의 선생님과 종국에는 환자 분들의 피 해가 없기 위해서는 이렇게라도 나는 글을 써야 했다.

 

 

진실은 그래도 밝혀져야 한다.

 

 

사람들은 매너리즘에 빠져 그냥 살기를 더 좋아했다. 합리적인 것, 환자를 위한 새로운 번거로움을, 변화를 요구하는 자를 싫어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나 같은 별종은 그 곳에 끼어 대충 타협해서 살지 못하니 고립되었다.

 

 

 

2017년 5월 내 연구 프로젝트와 밀린 논문들이 모두 종료되는 즉시 나는 결국 스스로 사표를 냈고 개원가로 나왔지만, 결국 11월부터 실직하였다.

 

 

고정한 목 척추 위 아래의 디스크가 결국 무리가 와서 수술 받은 Y 대학병원에서 진료를 받았다. 나를 수술한 분은 진료를 하지 않아서 다른 교수에게 진료를 받았는데, 6-7번 척추가 거의 맞닿을 정도이고 신경관이 좁아져 있는데도 전혀 이상 없다면서 신경주사를 맞으라고 해, 주사를 맞았지만 소용이 없었고, 오히려 더 증상만 악화만 되었다. 또 재방문시 나를 강직성척추염검사 양성이라면서 류마티즘 입원해서 검사하자고 했다. 다른 분이 수술한 환자, 더구나 환자인 의사를 진료하기 부담스러워하는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도저히 하루도 견디기 힘들어 저림 증상과 손의 힘이 약해져 결국 다른 병원에서 상담 후 6-7번 디스크에 인공 디스크를 넣었다. 이 병원에서 다시 시행한 유전자 정밀 검사에는 강직성 척추염 HLA 검사 음성으로 확진 되었다. 그 전에 대학병원에서 강직성척추염진단으로 내가 얼마나 마음 고생을 했는지 모르겠다. 유전질환일지도 모르니 아이들   을 걱정하며...결국 입원해서 류마티스 검사를 하면 돈도 시간도 모두 허비했을 것이다. 강직성 척 추염은 단지 피검사로 진단하는 것이 아니고, 또 골반에 허리에 아무 증상이 없는 나를 강직성 척 추염을 의심하는 그 신경외과 교수를 나는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또 검사결과도 이 병원 저 병 원에서 다르게 나온 것도 그럴 경우가 있긴 해도, 이것이 의료를 불신하게 되는 이유이다. 그 교수의 소견은 너무 달랐지만 또 더 전문가로 존중하나, 나는 솔직히 그에게 그저 치료하기 싫은  환자일 뿐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의사인 나도 이럴진대 의료정보에서 소외된 환자들은 더더욱 황당한 검사로 시간과 돈을 허비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지 않을까? 답답한 의료 현실이다.

 

 

수술 이후 잠을 잘 수는 있게 되었고 손의 힘도 회복되고 증상이 좋아졌지만 당연히 붙을 것으로 생각한 H병원 면접에 떨어졌다.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었을까? 이후 강동의 한 대학병원에도 지원했지만 병원장이 H병원 지인에게 알아보고 나는 또 거부되었다. 이력서의 논문들 특허 등의 내 최근 업적이나 경력들은 고려 되지 않았고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거부되어진 것 같다.

 

하지만, 모든 것은 나의 잘못이다. 몸이 약한 탓. 스스로 건강을 열심히 챙기지 못한 것. 수술 중 목을 많이 쓰는 직업인데 전혀 예방하고자 노력도 안 한 탓.

 

 

환자가 되어보면 이 한국에서 환자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안다. 긴 대기시간 짧은 진료. 원하는 의사를 예약하는 것 충분한 설명은 너무너무 어렵다. 너무 너무 의사를 만나서 제대로 상담하기가 나도 힘들었다. 의사인 나도 이 의료체계 속에서 환자가 되어 보니 모든 것이 엉 망징창이었다. 의사인 나도 이런데 일반 환자들은 더더욱 힘들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의사가 되어보면 저수가의 뒤틀어진 의료시스템에서 사악하지 않게 착한 의사로 살아가려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안다. 바지 기장 줄이는 것보다 얼굴의 열상 봉합수술 수가가 더 싼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의사들은 치료라는 의사의 기본에 충실하기 힘들다. 또 무분별한 결과가 입증 안된 각종 미용성형, 소비자를 속이는 시술과 수술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이 보건의료 저수가 시스템이, 자본이 의사들을 어쩔 수 없는 돈 버는 공장으로 가도록 이래저래 몰고 있다.

 

 

재건을 더 좋아하는 나 같은 바보 장애인으로 등록된 성형외과 의사는 다시 취직을 하기 힘들다.

 

 

각 대학병원은 끼리끼리 그들만의 리그로 온전하게 건설되어 있다. 다들 미용성형이 돈이 되니까 그곳으로 몰린다. 생명과 재건 치료는 오히려 너무 헐값이 되어버렸다. 매우 실력 있는 의사들과 비전문의 의사들이 점점 미용성형시장으로 빠지고 있다.

 

 

의료의 본질이 너무 왜곡되었다.

 

 

나는 단지 보통의 착한 의사로 살고 싶었지만, 그것은 멍청했고, 돈 벌 궁리를 제대로 못했다. 세상에 현명하게 적응하지 못하고, 몸은 망가졌다. 그저 착하게 살면 되는 줄 알았지만 주위의 의사 들은 환자를 너무 열심히 보는 의사를, 양심에만 따라서 살려고 하는 의사를 싫어한다. 아니 나는 결국 바보 이상주의자에 멍청한 의사일 뿐이었다.

 

최근 지원한 대학 병원들에서 탈락되었다. 아니 그들은 대학 파벌로 아무리 연구업적이 많고 논문을 많이 써도 공정한 인사를 하지 않았던 것 같고, 내가 가진 특허나 수상내역, 많은 논문 성과도 사실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그들만의 왕국 건설을 위해 내부적으로 이미 내정을 하고 공채를 하는 것인가? 또는 많이 부려먹을 돈벌이용 젊은 의사만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나에 대한 한 개인의 주관적 평가나 악담, 장애인인 것은 나에 대한 거부의 구실이 되었다.

 

 

H병원에서 탈락되고 나는 극심한 스트레스와 좌절감으로 우울해졌다. 다시 힘을 내어 취직을 하려고 돌아다녔고 가족을 위해서는 취직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대부분 나의 많은 경력을 부담스러워 했고, 또 나이를 부담스러워했을 뿐 아니라, 써먹기 부려먹기 좋은 젊은, 아무것도 모르는 의사가 아니라서, 또 미용성형경력이 부족하다고 나는 거부되었다. 난 개원가에서 쓸모 있는 젊은 노동자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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