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국노의 최후

시사

매국노의 최후

계룡산곰돌이 0 27,430 10.29 20:45


홍복원


고려의 간신, 역신(逆臣), 매국노. 후대의 조선(인)·한국(인) 입장에서는 민족 반역자. 본관은 남양(南陽). 초명은 홍복량(洪福良).


1218년(고종 5년) 강동성 전투가 발발할 당시 몽골 제국, 동하가 개입하여 처음으로 몽골이 고려에 들어왔는데 당시 아버지 홍대순이 인주도령으로 재직 중 몽골에 투항 및 항복하면서 이 때부터 홍씨 가문과 고려의 질긴 악연이 시작된다. 홍대순의 아들인 홍복원은 신기도령을 지내면서 1231년(고종 18년) 권황제 겸 몽골군 총사령관 살리타이의 1차 침입시 몽골에 투항하여 항복했고 1차 침입이 있은 이후 다루가치가 서경, 개경 등 2경과 북계 주변 곳곳에 설치되었는데 당시 다루가치가 무기를 휴대하고서 고려인을 겁박하고 피해를 끼치는 사례가 많자 서경의 고위층 내부에서 다루가치 살해 음모를 꾸몄고 당시 서경낭장의 지위에 있었고 그 곳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홍복원은 서경 주민들의 불안감을 조성하면서 서경 주민의 반란을 조장했다. 이처럼 몽골의 철병 이후 꾸준히 그들과 연락을 취하며 재침이 있을 것을 확신하고 각 주군의 고려 사람들을 끌어모아 살리타이의 군대와 합세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등 주도면밀함까지 보였다. 종합하면 서경의 민심을 조장하여 항전 개입을 차단시켰고 유사시 바로 전투에 돌입하도록 별동대를 조직한 것이다.

이후 살리타이의 2차 침입시 같이 세력을 합쳐 고려를 침탈하는 행위를 본격적으로 자행하기 시작했는데 앞잡이 및 길안내 역할을 하며 당시 고려의 지리를 잘 몰랐던 몽골의 침입을 도와 준다. 이 때 살리타이가 김윤후에게 저격당하며 2차 침입이 막을 내렸는데 나머지 사후 처리 문제를 전적으로 홍복원에게 일임하여 총책임자로 만들었고 홍복원은 서경을 아지트로 두면서 필현보 등, 서경의 몽골군과 합세하여 반란을 일으켜 몽골에 투항하고 서경을 몽골군에게 바쳤다. 이 때문에 고려인들과 최우 밑에서 일하는 도방의 가신들은 홍복원을 주인을 무는 개라고 욕했다고 한다. 1233년(고종 20년) 12월 홍복원은 마침내 고려로부터 퇴출되어 필현보는 죽고 본인은 교활하게 1,500호를 이끌고 몽골에 귀부하며 항복했는데 이 때 귀주를 비롯한 서경도호 예하의 40여 성을 들어다 몽골에다 갖다 바쳤다. 몽골은 홍복원이 들어다 갖다 바친 땅을 심양로(瀋陽路)에 편입시켰으며 이 공로를 인정받아 고려군민만호, 안무고려군민총관 직위를 제수받고 데리고 온 1,500호의 관리 및 차후 몽골로 귀부하는 고려인에 대한 모든 관할권을 부여받아 옛 동경로의 수부(首府)가 위치했던 요양에 총관부를 설치하여 이민 업무를 담당하고 요양 - 심양 등지의 고려민을 다스렸다. 그는 매양 고려를 침탈해야 한다는 등 고려가 몽골을 얕보고 있다는 등 온갖 참소를 하여 여몽 관계를 이간질시키는데 한몫을 했다.

이후 몽골은 고려를 침탈할 때면 늘 홍복원과 영녕공(永寧公) 왕준(王綧)을 데리고 가서 길잡이 역할을 시켰고 고려는 홍복원의 이같은 만행에 이를 갈다 못해 어떻게든 홍복원을 회유하고 달래기 위하여 앞서 반역의 무리라며 구금된 아버지 홍대순(洪大純)을 대장군 직위에 동생 홍백수(洪百壽)는 낭장 직위를 주었고 장위(張暐)를 홍복원의 사위로 삼아 뇌물을 보내는 등 달래기 위해 애를 썼으나 그의 악행은 거기서 그칠 줄을 몰랐다. 이같이 사악하고 납득하기 어려운 그의 행적을 두고서 <고려사>에서는 '주인을 무는 개'라는 표현을 쓰는 등 깎아내렸고 실제로 반신 열전에 포함되어 있을 정도로 악랄한 자였다. 툭하면 분쟁을 사주하고 항복하거나 월경한 고려민을 지배하는 등 당시 불편한 여몽 관계에서 중간 이득을 취한 좀도둑 같은 인간이었다.

나중에는 영녕공 왕준과 사이가 벌어져 다투다가 화를 참지 못하고 “내가 그대에게 베푼 은혜가 얼마이거늘, 집에서 기르던 ㄱ새끼가 주인을 무는구나!”라는 희대의 폭언을 날렸다. 문제는 마침 근처에 있던 왕준의 처가 통역을 통해 그 말을 들었다는 것. 왕준의 처는 몽케 칸이 주선하여 왕준에게 시집보낸 여성으로, 그녀의 정체는 대칸의 부마인 고당왕(高唐王, 몽골 옹구트 부의 족장으로서 황금씨족의 부마인 사람이 갖는 왕호) 부야우트카(孛要合, buyawtqa, 시호는 무의(武毅).)와 조국대장공주(趙國大長公主) 아라카이 베키(阿剌海別吉, 칭기즈칸의 셋째 딸) 사이에 태어난 고명딸, 그러니까 방계 황금씨족이었다. 이를 듣고 있던 왕준의 아내는 즉시 처들어와 “나는 황족으로, 황제께서 남편을 고려(高麗) 왕족이라고 하여 그의 첩이 되도록 시집보내셨다. 이로써, 아침저녁으로 부지런히 모시며 두 마음을 갖지 않았다. 남편이 만약 개라면, 어찌 어떤 사람인들 개와 같이 사는 자가 있겠느냐? 내 마땅히 황제께 아뢸 것이다.(我皇族也, 帝以公爲高麗王族, 而嫁之妾. 以是, 朝夕恪勤, 無貳心. 公若犬也, 安有人而與犬, 同處者乎? 吾當奏帝.)”라고 말하고 그 즉시 황궁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제야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왔음을 감지한 홍복원은 전재산을 다 바칠테니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빌었으나 왕준의 처는 이를 참지 못하고 입궐하여 몽케 칸에게 홍복원의 만행을 고발했고 그 내용에 대노한 몽케 칸은 장사 수십 명을 보내 홍복원을 말 그대로 박살(撲殺)내어 죽였다. 즉 칼 같은 흉기로 찔러죽이거나 베어죽이는 형태가 아니라, 여러 사람이 죽을 때까지 폭행을 했다는 뜻이다. 대신 몽둥이 정도의 둔기는 쓴 듯하다. 몽골인들이 보통 땅바닥에 피를 흘리는 것을 철저히 금기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참혹하게 죽인 것으로 보아 당시 몽케 칸의 분노가 엄청났음을 짐작할 수 있다.그의 비참한 최후는 이후 아들 홍다구가 고려를 원망하여 악랄한 만행을 저지르는 배경이 된다.

 

 

이찍찍당 매국노들과 이찍찍이들의 최후가 이러하길 바랍니다.

 


[출처 : 오유-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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