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그만 격노하세요

시사

이제 그만 격노하세요

hsc9911 0 28,196 05.09 06:38

(정동칼럼)

“대통령의 말 그 자체가 권력 행위이다.” 어제 경향신문이 지난 2년간 윤석열 대통령이 한 말들을 집중 해부하면서 던진 말이다. 말은 곧 메시지이고 그 안에는 권력의 구조와 방법이 담겨 있다. 또한, 말은 이성적인 언표만 포함하지 않는다. 함께 표현되는 감정과 몸짓도 권력자의 중요한 메시지 표현수단이다.

아마도 지금까지 국민들의 뇌리에 박힌 가장 인상적인 대통령의 메시지는 “격노”였을 것이다. 내용 없이 화만 버럭 내는 그의 통치스타일 속에는 그만의 독특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짐은 곧 국가다”라는 절대왕조에서나 볼 수 있는 시그널이다. 그 한마디로 주변 사람들을 떨게 하고, 수습하느라 무리수를 두게 만든다. 대통령은 격노만 할 뿐, 사과는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스스로 군주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사회에서 대통령을 왕이나 군주에 비유하는 것은 단순한 농담이 아니다. 한국에는 아직까지 시대착오적이고 전근대적인 정치문화가 잔존한다. 우선, 대통령은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권력자로서 그 지위를 보장받는다. 미디어는 대통령의 이미지를 왕권에 비유하기를 서슴지 않으며, 그 권력을 부지불식간에 조선왕조의 제왕적 이미지로 포장한다.

그는 일종의 ‘군주(君主)’ 즉 국민을 백성과 신하로 거느린 ‘국가의 주인’으로 등극한다. 정치인들 스스로 대통령 주변의 사람들을 ‘간신’이나 ‘충신’ 등으로 묘사한다. 대통령 부인을 국모라고 부르는 정신 나간 사람들도 있다. 이런 것을 닮은 것인지 기업 드라마에선 재벌들이 기업 노동자들을 대놓고 ‘머슴’으로 부른다. 한국의 정치문화와 권력구조는 여전히 조선시대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조선왕조가 막을 내리고 기나긴 일제강점기를 지나 민주공화국으로 출범한 지도 벌써 70여년이 흘렀지만, 정치문화 속에 고인 제왕적 통치 이미지와 잔재는 아직까지 우리 뼛속에 남아 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대통령이 스스로를 군주라고 착각하는 것도 그의 잘못만은 아니다.

최근 대통령의 존엄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방심위와 선방위가 대통령 부부 비판 보도에 대해 줄줄이 징계하는 ‘입틀막’ 정부 이미지는 대통령을 제왕적 군주로 모시는 전근대적 정치문화를 그대로 보여준다. 방송에서의 정치 풍자와 평론에도 재갈을 물렸고, 유튜브와 소셜 미디어에 대해 고소 고발이 난무한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얼마 전 국경없는기자회가 발표한 세계언론자유지수에서 한국 언론자유의 순위가 순식간에 15계단 추락한 62위에 그쳤다는 뉴스는 놀랍지도 않다. ‘눈 떠보니 후진국’이라는 말이 제대로 실감난다.

돌이켜 보면, 보수정부만 들어서면 언론자유가 추락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이명박 정부 때 69위, 박근혜 정부 때 70위, 그리고 올해 62위를 기록했다. 내년에는 또 얼마나 더 떨어지게 될까? 도대체 왜 “자유”민주주의를 전면에 내거는 보수정부만 들어서면 언론자유도가 추락하는 것일까?

그런 와중에 최근 조·중·동은 앞다투어 대통령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를 군주로 착각하게 만들고 그의 눈과 귀를 가리는 데 일조한 주요 대중매체였지만 서서히 그와 손절하고 있는 듯하다. 조선일보는 ‘대통령을 향한 국민의 분노’를 전했고, 동아일보는 그의 ‘비전 없음’을 비판했다. 중앙일보는 ‘다음에는 이런 대통령 뽑지 말아야’ 한다는 식의 직격탄을 날렸다. 최근 일부 보수 유튜버들도 대놓고 탄핵과 하야를 말한다. 조만간 보수 언론에 대해서도 압수수색이 들어가는 촌극이 벌어질지 두고 볼 일이다.

분명히 말하건대, 대통령은 제왕이 아니다. 만일 존경받고 싶으면 존경받을 만한 행동을 하면 된다. 국가지도자의 권위와 존경은 방심위나 검찰력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원하는 정책과 효과성을 통해 생성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교사의 권위가 회초리에서 나오지 않는 것과 같다.

[정동칼럼]이제 그만 격노하세요 - 경향신문 (khan.co.kr)

[출처 : 오유-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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