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극성의 사회에서 대충 살아가는것의 어려움.

시사

양극성의 사회에서 대충 살아가는것의 어려움.

iamtalker 0 45,588 08.15 15:07


내가 한국에서 발견하는 것은 극단적 양극성의 대립과 공존이다.


남자 대 여자

북한 대 남한

부자 대 빈자

좌파 대 우파

친일 대 친북

기존의 성관념 대 LGBTQIA+ 성소수자


이런 대립 요소들은 너무나도 강력하게 양극성을 형성하고 있으며, 그 결과 평범한 사람들조차 그 대립에 휘말려 극단적인 입장으로 변해버린다.


내 자신을 돌아보자면, 나는 극단적인 남성 혐오도 반대하며, 동시에 극단적인 여성 혐오도 반대한다. 부자 혐오를 반대하며, 빈자 혐오 역시 반대한다. 극단적인 우파 정책뿐만 아니라, 극단적인 좌파 정책도 반대한다. 이성애자들이 성소수자들을 핍박하는 것을 반대하지만, 성소수자들이 너무 과도하게 자신들의 정체성을 이성애자들에게 강요하는 것 또한 반대한다. 북한의 폭압적 독재 정권인 김정은 정권을 반대하지만, 동시에 일본의 과거 친일 식민 제국주의를 긍정하려는 움직임도 반대한다.


나는 그저 한 개인의 가치를 중요시하며, 개인으로 존재하고 개인으로서의 자유를 존중받고 싶다. 따라서 타인의 자유 역시 존중해주는 개인주의자이자 자유주의자로 살고 싶다.


이렇게 말하니, 나를 두고 "극중주의"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극단의 중심에 서겠다는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상식의 테두리 안에서 움직이고 싶다는 것이다.


중용은 단순히 중간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뜨거울 때는 차가운 것으로 식혀주는 것이 중용이다. 너무 빠를 때는 속도를 줄이는 것이 중용이다. 즉, 어떤 것이 지나치게 치우쳤을 때 그 반대 속성을 부여하는 것이 중용이다. 그러나 극단적인 현상에 대응하기 위해 나 또한 극단으로 치우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작금의 현실을 보면, 이 엄청난 양극성의 텐션 속에서 나 같은 사람은 양쪽의 극단주의자들에게 공격받고, 결국 소멸될 위험에 처할 수밖에 없다.


한쪽이 극단적으로 나오면 거기에 대항하기 위해서 다른쪽도 극단적이 된다. 이러한 극단의 연쇄는 증폭되며 마침내 광기로 변질되어가기 시작한다. 현대인들은 이런 양극성의 광기에 노출되어 있는 셈이다. 그렇게 양극성은 서로가 대립하고 대적하며 동시에 공존한다


이런 사회에서는 적당히, 대충 살아가려면 오히려 극단적으로 사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극단적인 입장을 피하고 상식의 범주에서 균형을 유지하려는 사람들은 양쪽의 압박에 시달리며, 끊임없이 자신의 입장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어떻게 해야 이 양극성의 극단주의를 완화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해야 양극성을 유지하면서도 이 양극이 비정상적이고 비상식적인 방향으로 흐르는 것을 차단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고민이 필요하다.


[출처 : 오유-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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