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의 일이다. 그때 하루는 <시사매거진 2580> 출범의 주역인 데스크 선배로부터 고엽제 후유증이 2세에게 대물림되어 이중의 고통을 겪는 월남전 파병용사들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며 취재해보라는 지시를 내렸다.
요즘은 사라진 두꺼운 전화번호부를 찾아 고엽제전우회 번호를 알아내어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방문 날짜를 정했다. 약속된 날에 서울 잠실에 있는 향군회관으로 찾아갔는데 몇 평 될까 싶은 작은 사무실은 어둡고 칙칙했다. 고엽제 후유증이 2세에게 대물림되는 사례가 파악해달라고 부탁했고, 고엽제전우회는 지회를 통해 파악한 사례와 연락처를 알려주었다. 그렇게 고엽제 후유증 대물림 취재는 시작되었다. 논산에서 전주와 김해를 거쳐 포항으로 이어지는 여정이었다.
고엽제 후유증을 앓는 파월용사들은 대부분 형편이 어려웠다. 참전 수당을 모으면 고향의 부모님에게 논 한 마지기라도 사드릴 수 있겠다 하여 지원한 가난한 집안의 병사들이었다. 월남에서 복무할 당시에는 고엽제가 뭔지도 몰랐고 누가 알려주지도 않았다고 했다.
귀국하고 몇 년이 지나서야 심하게 가렵고 등과 배에 또는 팔이나 다리에 무더기로 발진이 생기는 증상이 나타났지만 고엽제 후유증이라는 건 생각도 못했다. 시간이 한참 지나서 비슷한 증상을 앓는 파월용사들이 있고 미국에서도 문제가 되고 있다는 언론의 보도를 보고서야 그게 고엽제 후유증이란 걸 알게 됐지만, 우리 병사들을 남의 나라 전쟁터로 보낸 정권은 아무 조치를 하지 않았다.
나름 공들여 취재했고, 밤을 지새우며 기사를 작성했다. <시사매거진 2580>에서 방송한 ‘대물린 고엽제 후유증’은 시청자들의 반응도 좋았고, 다행스럽게도 민주진영에서 성장한 대통령들은 ‘국가의 의무’에 관심이 있어 고엽제 후유증 피해자들에게 치료과 보상 등 국가의 보살핌이 비로소 시작되었으니 취재와 보도를 한 기자로서 큰 보람을 느끼기도 했었다.
<시사매거진 2580>에서 ‘대물린 고엽증 후유증’ 취재와 보도를 하고 한참이 지나서, 이명박 정권 초기의 광우병 사태로 기억하는데, 고엽제전우회 회원들이 MBC 앞에 몰려와 가스통을 들이대며 빨갱이 방송 MBC를 폭파하겠다고 협박하는 사건이 있었다.
그때 그 살벌한 현장을 보면서 ‘대물린 고엽제 후유증’을 취재할 때 찾아갔던 칙칙하고 어두운 고엽제전우회 사무실이 떠오르고, MBC 카메라 앞에서 가슴을 치며 눈물을 쏟던 파월용사들이 떠올랐다. MBC의 그런 보도가 없었다면 고엽제 피해자들은 지금도 팔자를 원망하며 가슴을 치고 있을 것이고, 고엽제전우회는 여전히 향군회관의 작은 사무실에서 가난한 살림을 이어가고 있을 텐데 하는 생각에 국가의 지원으로 이전에 비해 부유해진 고엽제전우회에 화가 나기도 했다.
[출처 : 오유-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