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에 치명적인 역할을 했던 제임스 하우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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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에 치명적인 역할을 했던 제임스 하우스만

쉬는차에 0 131 2023.04.03 20:32

제임스 하우스만(James Harry Hausman·1918 ~1996)은 1946년 8월 12일 남한 주둔 미 점령 군사령부의 조선경비대사령부 창설 요원으로 부임하여 대한민국 국군 창설에 앞장섬으로써 ‘국군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얻은 미국 육군 대 위 출신이다. 이후 그는 국방경비대 고문관·군사고문단 고문, 1951년 미 국방부 국방정보부에서 한국담 당, 1950년 채병덕과 이승만의 군사고문을 지 내면서 한국군 형성과정에서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1995년 정일화 박사와 함께 『한 국 대통령을 움직인 미군대위』(한국문원)라는 비화 발굴  제임스 하우스만과 박정희, 그리고 5·16 -전 월간조선 편집장 김용삼 박정희정신 편집장 [email protected] 하우스만, 숙군 수사 때 이승만 대통령에게 “박정희 살려야 한다” 요청. 5·16 때는 주한미군과 박정희의 중재자 역할 맡아. 미국 정부의 ‘5·16 지지와 지원’ 끌어낸 것도 하우스만의 작품 하우스만, 사형 위기의 박정희 살려내다 148 -박정희정신 2017. 05/06 Vol. 3 하우스만, 사형 위기의 박정희 살려내다- 149 증언록을 발간했다. 정일화 박사가 하우스만을 인터뷰하여 증언록 형식으로 펴낸 이 책에서 하우스만은 자신과 박정희 대통령이 초 급장교 시절부터 인연을 쌓은 흥미로운 관계를 증언하고 있다. 이 증언록에서 주목할 부분은 국군 제14연대의 반란사건 직후 단행된 숙군 과정이다. 당시 박정희 소령은 남로당 관련 문제로 체포되었는데, 하우스만이 직접 이승만 대통령에게 박정희 소령 의 구명을 요청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져서 석방되었다는 것이다. 증언록에 나타난 박정희 대통령 관련 주요 부분을 중심으로 두 사람의 인연을 소개한다. 제임스 하우스만은 1946년 8월 12일, 잘 다림질 된 미 육군 대위 군복을 입고 서울에 도착했다. 출생지는 미국 뉴저지. 그는 어린 시 절부터 군인을 동경했다. 16세 되던 고등학생 시절 군에 입대하려 했으나 징집 연령에 미달하여 뜻을 이룰 수 없었다. 그는 꾀를 내어 6살 위인 형의 신분증을 훔쳐 육군 사병으로 입대한다. 형의 호적 을 가지고 입대한 결과 그는 ‘제임스 하우스만’이 아니라 형의 이름 인 ‘존 하우스만’으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될 무렵인 1941년, 그는 까다로운 장교 시 험 과정을 거쳐 예비역 육군 소위로 현지 임관했다. 이 무렵 징병 연령이 된 ‘제임스 하우스만’에게 징집 통보가 날아왔다. 이미 육군 소위로 군 생활을 하고 있던 하우스만은 난감한 상황이 되자 변호 사를 통해 이실직고를 하게 된다. 지난 6년 간 형의 이름을 사용해 군 생활을 했으며, 군에서의 근무 성적 등을 부대장 소견서를 붙여 국방부장관 앞으로 성명 및 생년월일 변경 탄원서를 제출했다. 타의 모범이 되는 군 생활을 한 인물이었기에 국방부는 탄원서를 심사한 결과 1941년 3월 19일 그의 이름을 ‘존 하우스만’에서 ‘제임 스 하우스만’으로, 생년월일도 1912년 12월 6일에서 1918년 2월 28 일로 원위치하는 것을 허락했다. 그는 곧 현역으로 소집돼 장교 계 급장을 달고 유럽 전선으로 달려가 일선 소대장으로서 혁혁한 전공 박정희 구명에 헌신했던 하우스만 대위(가운데)의 모습. 하우스만의 노력으로 박정희는 풀려나 문관으로 근무하게 되었고,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현역으로 복귀했다. 150 -박정희정신 2017. 05/06 Vol. 3 을 쌓았다. 1944년 벌지 전투에서 독일군과 용감하게 싸우다 부상 을 당했고, 당시 전투의 공로로 퍼플 하트 훈장과 브론즈 스타 훈장 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6년 8월, 그는 도쿄의 극동군 사령부 로 전출되었다. 그곳에서 하우스만은 누구도 가기를 꺼려했던 미지 의 땅 남한 근무를 자원한다. 미 점령군사령부의 조선경비대사령부 창설 요원으로 부임하면서 그는 한국과 깊은 인연을 맺게 된다. 8연대 소위 박정희 남한에서의 첫 보직은 춘천의 8연대 연대장이었다. 8연대는 박 정희가 조선경비사관학교(육사의 전신)를 졸업하고 1946년 12월 14일 소위로 임관하여 8연대 제4경비초소장으로 근무했던 부대다. 만약 하우스만이 좀 더 오래 이 부대에서 근무했다면 신참 소위 박 정희로부터 경례를 받는 입장이 되었을 것이다. 하우스만의 8연대장 생활은 한 달 만에 끝났다. 8연대장을 원용 덕에게 인수인계하고 맡은 다음 보직은 조선경비대 총사령관 배로 스 대령의 수석 보좌관이었다. 배로스 대령이 제주도지사로 발령이 나면서 하우스만은 초대 총사령관 송호성이 임명되기 전까지 사실 상 조선경비대 총사령관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미군 조직법을 번역하여 조선경비대 조직법을 입안했고, 일 본군·만주군·광복군 출신 등 실전경험이 풍부한 장교들을 중용 하여 대한민국 국군의 뼈대를 만들어 나갔다. 하우스만, 사형 위기의 박정희 살려내다- 151 152 -박정희정신 2017. 05/06 Vol. 3 하우스만은 증언록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의 정치적 자립을 위해 투쟁한 분,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 자립을 위해 대단한 공적을 세운 정치인이라고 평한다. 하우스만과 박정희와의 인연은 1947년 무렵 시작된다. 소위로 임관한 박정희는 송청 지역의 38선 경비를 담당하다가 1947년 5월, 춘천 연대본부의 작전참모 대리로 임명됐다. 8연대장 원용덕은 자신의 부하 박정희가 매우 강한 외국인 혐오증이 있다고 하우스만 대위에게 보고했다. 8연대 소대장으로 부임한 박정희는 연대의 미군 고문관과 언쟁을 벌였으며, 원용덕 연대장이 휘하 장 교들에게 “한국군 장교들은 영어를 좀 배워야 한다”고 말하자 박정 희 소대장이 “이것이 미국 군대입니까. 한국 군대입니까” 하고 치 받았다는 것이다. 박정희가 근무했던 8연대 장교들 중에는 남로당 관련자들이 많 았다. 박정희와 만주 신경군관학교 동기였던 이상진 소령은 당시 8 연대 부연대장으로서 박정희의 직속상관이었는데, 그도 남로당원 이었다. 초급 장교로 부임한 박정희는 이들과 자주 어울리면서 공 “나는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이 숙군 작업이 얼마나 잘 엄중하게 처리 되고 있는가에 대해 1일 보고를 하도록 명령 받고 있었다. 나는 그때 신 성모 국방장관, 윌리엄 로버츠 고문단장 등과 함께 수시로 이 대통령을 만나고 있었다. 박정희 피고의 형 집행을 면죄해 줄 것을 이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그 이유로 나는 그가 일본 육사 출신으로 모스크바 공산주의자 는 아니며, 군의 숙군 작업을 위한 군 내부의 적색 침투 정보를 고스란히 제공한 공로를 들었다. 내가 알기로는 백선엽, 정일권은 채병덕 총장에게 박의 사형 집행을 면죄해 줄 것을 공식 건의한 외에 이승만 대통령에게 각각 개인적으로 찾아가 박의 면죄를 호소한 것으로 안다.” 하우스만, 사형 위기의 박정희 살려내다- 153 산주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남로당에서도 박정희가 대 구 폭동 당시 사망한 박상희의 동생이라는 점 때문에 당에 대한 충 성도가 높을 것으로 판단했을 가능성도 있다. 육사 3기 출신으로 춘천 8연대 시절 박정희 아래서 교범 번역 등 을 도왔던 염정태(육군 대령 예편)의 증언에 의하면 8연대에는 좌 익 군인이 수두룩했는데, 박정희와 신경군관학교 2기 동기생인 이 상진 부연대장이 연대 내 남로당 총책이었다고 한다. 당시 군부 내 의 남로당 세력들은 포섭 대상자를 남로당에 가입시키기 전에 ○, △, ×로 분류한 다음 검증을 거쳐 최종으로 ‘○’를 받은 자에 한해 가입을 시켰다. 이때 박정희도 ‘○’를 받아 가입시켰을 것으로 추정 했다. 박정희는 중위를 거치지 않고 바로 대위로 승진하여 1947년 9월 27일 조선경비사관학교 중대장으로 보직을 옮겼다. 사관학교 중대 장 겸 전술학 교관으로서 생도들을 교육시키면서 박정희는 군 인생 에서 결정적인 인맥을 형성하게 된다. 하나는 강창선(제2중대장)· 김학림 대위(2중대 2구대장) 등 남로당 세력과의 인연이요, 다른 하나는 생도 거의 대부분이 월남한 북한 청년들로 구성된 5기생을 중심으로 한 5·16의 귀중한 동지들을 얻게 된다. 김재춘(6관구 참 모장), 문재준(6군단 포병사령관), 박치옥(공수단장) 등 5기생들은 5·16때 실병력을 동원하는 역할을 한다. 1948년 8월 박정희는 소령으로 진급하여 육군본부 정보국에 부 임했다. 1948년 10월 19일 국군 제14연대가 여수와 순천 일대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기 위해 광주에 육군총사령관 송호성 준장이 지휘하는 호남지구 전투사령부가 설치됐다. 이때 박정희는 154 -박정희정신 2017. 05/06 Vol. 3 광주에서 김점곤 작전참모를 보좌하며 작전 상황판 정리 및 작전 보고서 작성을 담당했다. 박정희 소령이 광주 지휘본부에서 근무하게 된 계기는 김점곤 작 전참모와의 인연 덕분이다. 김점곤은 박정희가 조선경비사관학교 중대장 재직 시절 정보수집 능력, 치밀한 작전 계획을 수립하는 비 범한 능력이 있다는 점을 눈여겨보고 특별히 육군본부에 부탁하여 현장에 파견 근무를 하도록 주선했다. 하우스만은 국군 14연대가 반란을 일으키자 선발대로 광주에 내 려가 토벌군 사령부(호남지구 전투사령부)를 설치했다. 그는 만약 토벌군 사령부가 효율적인 진압 작전을 수행하지 못할 경우 자신이 직접 작전을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으며. 진압군 사령부 의 조직 및 작전 과정의 운용을 위한 지원 및 감독을 전적으로 책임 지고 있었다. 광주 토벌군 사령부에서 만난 하우스만과 박정희 이때 호남지구 전투사령부에서 하우스만은 원용덕 연대장으로부 터 전해 들었던 박정희 소령과 처음으로 조우하게 된다. 당시 박정 희는 어느 정도 영어 해독 능력이 있었다고 한다. 하우스만이 천천 히 영어로 말하면 어지간한 내용은 다 알아듣는 수준이었으나 자신 과 영어로 말하려 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작전과 관련하여 의사소 통이 필요할 때 두 사람은 하우스만의 전문 통역관을 맡았던 고정 훈을 통해 대화를 나누었다. 하우스만, 사형 위기의 박정희 살려내다- 155 호남지구 전투사령부에서 함께 근무하면서 하우스만은 박정희로 부터 “가난의 상징인 초가집을 없애야 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후 에 그가 대통령이 된 후 실제로 전국의 초가집을 없애고 경제 성장 을 이룩한 것을 직접 목격하고는 그의 업적을 높이 평가했다. 하우스만은 1974년 주한미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리처드 스틸웰 장군의 특별보좌관이었다. 그는 스틸웰 사령관에게 오래 전에 박 정희에게 직접 들었던 “초가집을 없애겠다”고 했던 발언을 전해주 었다. 스틸웰 사령관은 1976년 퇴역하여 귀국했다가 1978년 내한했다. 이때 박정희 대통령의 초대로 경기도의 한 골프장에서 함께 라운딩 을 했다. 박 대통령이 언덕 저 멀리로 보이는 마을을 가리키며 “참 아름답지요”라고 말했다. 스틸웰 장군은 “그것은 대통령께서 육군 초급장교 시절에 꿈꾸었던 것의 실현이 아닌가요”라고 답하자 대 통령이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다. 스틸웰 장군은 “하우스만 으로부터 들었다”라고 답했다.1) 국군 14연대 반란사건이 진압된 후 박정희는 육군본부 작전교육 과장으로 복귀했는데, 며칠 후인 1948년 11월 11일 숙군 수사팀인 김창룡에게 체포되었다. 남로당 군사부 책임자 이재복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박정희가 남로당원임이 드러난 때문이다. 박정희 체포조 를 지휘한 김창룡과 수사관들이 박정희가 사는 집을 급습했을 때 박정희는 줄톱으로 45구경 권총에 새겨져 있는 총 번호를 지우고 있었다. 박정희는 “암살용으로 사용할 권총을 제공하라는 윗선의 1) 제임스 하우스만·정일화 공저, 『한국 대통령을 움직인 미군대위』, 한국문원, 1995, 15~16쪽. 156 -박정희정신 2017. 05/06 Vol. 3 요구 때문에 총 번호를 지웠다”고 진술했다. 박정희는 헌병대에서 김창룡으로부터 조사를 받았는데 김창룡 이 “박 소령은 직접 사람을 죽이거나 부대 물품을 빼돌린 게 아니잖 소? 전향하세요. 군 내부의 남로당 조직에 대해 말해 주시오. 함께 나라를 살립시다” 하고 권유하자 국군 내에 침투한 남로당원의 명 단을 상세하게 진술했다. 함께 조사에 참여했던 김안일 정보국 특무과장이 박정희에게 자 술서 용지를 건네자 그 동안 숙군 수사팀이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던 군 내부 남로당 핵심 요인들의 조직표, 군내 지령문제 등 결정 적인 내용이 담긴 자술서를 적어 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사형 위기에 처한 박정희를 살려낸 사람은 백선엽 당시 정보국장과 박정희의 사관학교 동기생인 김안 일이었다. 김안일은 박정희의 자술서를 보고 백선엽에게 구명을 호 소했다. 백선엽은 박정희의 만주군 선배였지만 나이는 박정희보다 세 살 아래였다. 백선엽은 만주군 시절부터 박정희의 명성을 잘 알 고 있었다. 그는 박정희를 정보국장실로 불렀다. 다음은 백선엽의 증언이다. ‘숙군 5단계 작업이 완결될 즈음인 1949년 초 어느 날 방첩대의 김안일 소령이 나에게 “박정희 소령이 국장님을 뵙고 할 말이 있다 고 간청하니 면담을 해 주십시오” 라고 전했다. 김 소령은 아울러 박정희 소령이 조사 과정에서 군내 침투 좌익 조직을 수사하는 데 적극 협조했다는 점을 들어 꼭 만나줄 것을 요청했다. 김 소령은 나 의 승낙이 있자 곧 박정희 소령을 나에게 데려왔다. 내가 박 소령을 면담한 곳은 정보국장실이었다. 박 소령은 한참을 묵묵히 앉아 있 하우스만, 사형 위기의 박정희 살려내다- 157 다가 입을 열었다. “나를 한 번 도와주실 수 없겠습니까.” 작업복 차림의 그는 측은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면담 도중 전혀 비굴하지 않고 시종 의연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 평소 그의 인품에 대해서는 약간 알고 있었으나 어려운 처지에서도 침착한 그의 태도 가 일순 나를 감동시켰다. “도와드리지요.” 참으로 무심결에 이러한 대답이 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백선엽은 김안일, 김창룡 등 실무자들의 의견을 물었다. 김창룡 등 조사관들은 모두 박정희 구제에 동의했다. 그런데 하우스만의 증언록에 의하면 박정희의 구명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내용이 발견된다. 하우스만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박정 희의 형 집행을 면제해 줄 것을 직접 보고했고, 이승만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사형을 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음은 이 문제와 관련한 하우스만의 증언이다. 박정희 구명 비화(祕話) ‘나는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이 숙군 작업이 얼마나 잘 엄중하 게 처리되고 있는가에 대해 1일 보고를 하도록 명령 받고 있었다. 나는 그때 신성모 국방장관, 윌리엄 로버츠 고문단장 등과 함께 수 시로 이 대통령을 만나고 있었다. 박정희 피고의 형 집행을 면죄해 줄 것을 이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158 -박정희정신 2017. 05/06 Vol. 3 그 이유로 나는 그가 일본 육사 출신으로 모스크바 공산주의자는 아니며, 군의 숙군 작업을 위한 군 내부의 적색 침투 정보를 고스란 히 제공한 공로를 들었다. 내가 알기로는 백선엽, 정일권은 채병덕 총장에게 박의 사형 집행을 면죄해 줄 것을 공식 건의한 외에 이승 만 대통령에게 각각 개인적으로 찾아가 박의 면죄를 호소한 것으로 안다. 그러나 백선엽이나 정일권이 서로 어떤 약속을 하고 이 대통령을 찾아간 것은 아닌 것으로 알며, 나도 어떤 개별 권고나 공식 건의에 의해 이 대통령에게 박을 변호하러 간 것은 아니었다.’ 2) 요약하자면 하우스만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사형 위기에 처한 박 정희 소령의 구명을 건의했고, 이 건의가 받아들여진 것이다. 이로 써 박정희의 생명의 은인은 백선엽, 정일권, 채병덕에 이어 하우스 만이 더 추가되어야 할 것 같다. 박정희 소령의 구명 사례에서 보듯 하우스만의 건의가 이승만 대 통령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 대통령의 계급이 대위에 불과했던 하우스만을 대단히 신뢰했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은 오랜 기간 해외에서 망명 생활을 하며 풍찬노숙하다 귀국 한 덕분에 일본군, 만주군, 광복군 등 잡다한 인맥으로 형성된 군부 의 세세한 사정을 잘 알지 못했다. 때문에 계급은 비록 하급 장교에 불과하지만 우리 군부의 인맥을 훤히 꿰고 있는 ‘국군의 창설자’ 하 우스만을 하루가 멀다하고 경무대로 불러 군부와 관련된 조언을 들 었다. 2) 제임스 하우스만·정일화 공저, 앞의 책, 34쪽. 하우스만, 사형 위기의 박정희 살려내다- 159 “나는 하우스만을 원한다” 한국에 미국 대사가 부임해 있고, 게다가 주둔군 사령관은 물론 군사고문단장 등 고위 장성들이 즐비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하우스만을 굳게 신임했다. 이런 상황은 외교 관례상 정상적이라 고 볼 수는 없었다. 미국 정부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군 관계 자문 을 위해서라면 하우스만 대신 계급이 높은 유능한 장성을 보내주겠 다”고 여러 차례 건의했다. 그 때마다 이 대통령은 “나는 유능한 장 성이 아니라 하우스만을 원한다”면서 미국 측의 양해를 구했다. 하우스만은 6·25 전쟁 기간 중에 미 국방부 한국정보과로 전출 되었다가 1956년 3월 주한유엔군사령관 특별보좌관으로 다시 한국 땅을 밟았다. 1960년 4·19로 자유당 정권이 몰락하고 민주당 정권이 출범했 다. 장면 총리도 외교관 출신으로서 군 관련 문제, 군부 인맥에 대 해서는 백면서생(白面書生)이나 다름없었다. 고민 끝에 장면 총리 는 이승만 대통령의 전례를 따라 한국 군부와 관련해서는 타의 추 종을 불허하는 전문가이자, 대한민국 국군의 ‘살아 있는 역사’나 다 름없는 하우스만에게 군사 자문을 요청했다. 하우스만은 이 사실을 자신의 직속상관인 주한미군사령관과 주한 미국대사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허락할 수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 다. 주한미군 사령관의 일개 보좌관이 대한민국 최고 통치권자의 군 사 자문 역을 맡는 것은 외교 관례상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자신의 요구가 거절당하자 장면 총리는 하우스만에게 “일등병으 로부터 장군에 이르기까지 한국군을 돕는 데 앞장섰던 당신이 이 160 -박정희정신 2017. 05/06 Vol. 3 나라의 국무총리인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는 것은 대단히 섭섭한 일”이란 메시지를 보냈다. 장면 내각은 군의 조직 원리와 생리에 너무나 문외한이었다. 장 면 총리는 너무 자주 군 최고 지휘부를 교체함으로써 군부를 뿌리 부터 뒤흔들었다. 4·19 한 달 정도 후인 5월 23일, 송요찬 육군참 모총장을 해임하고 후임에 최영희 장군을 임명했다. 송요찬 장군은 1959년 2월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됐다. 미군들로부터 ‘타이거 송’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용 감했던 송요찬은 3·15 부정선거 때 군 부정선거의 총책임을 지는 자리에 있었지만, 박정희를 비롯한 몇몇 장군들의 이탈(부정선거 거부)에 대해 못 본 체 넘어갔다. 4·19 때는 시위 군중에게 발포하 지 않음으로써 한국 민주주의의 문을 열 수 있도록 한 인물이다. 4·19 전후부터 계엄사령관에서 물러날 때까지 송요찬 장군은 단 하루도 집에 들어가서 잠을 잔 적이 없었다. 참모총장실에 야전 침대를 가져다 놓고 밤새 일하다가 잠시 눈을 붙이곤 했다. 당시 송 요찬은 하우스만에게 “이승만 대통령을 위해서는 총을 들어야 하 고, 독재 타도를 외치는 국민을 위해서는 총을 내려야 한다”고 말 하면서 엄청난 체구에 걸맞지 않게 눈물을 줄줄 흘렸다. 박정희를 밀어준 송요찬 장군 송요찬은 4·19 후 계엄령을 조속히 해제하고 새 정부를 출범시 키는 데 일말의 사심도 없이 협력했지만 장면 정부는 그를 해임한 하우스만, 사형 위기의 박정희 살려내다- 161 후 잡범 죄목을 걸어 구속하려 했다. 하우스만은 송요찬 장군의 미 국 유학을 주선하여 조지 워싱턴 대학에서 1년간 연구원 신분으로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송요찬은 중학교도 못 나온 학력이었는데, 지원병으로 일본군에 입대하여 해방 무렵에는 오장(하사)까지 진급했다. 해방 후 최경록 장군의 도움을 받아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하여 1946년 5월 1일 육 군 참위(소위)로 임관했다. 학력 콤플렉스가 있던 송요찬 장군은 자 신과는 달리 사범학교와 일본 육사 출신인 박정희를 좋아했다. 남 로당에 연루됐던 전력 때문에 부대장을 한 번도 해보지 못하고 늘 부(副)책임자 노릇만 하면서 소외되어 있던 박정희에게 사단장의 길을 열어준 사람이 바로 송요찬 제1야전군 사령관이었다. 박정희는 사단장 시절 치명적인 사건 사고가 발생하여 해임 위 기를 여러 차례 겪었다. 제5사단장 재직 시절에는 혹한기 훈련 중 부대원들이 잠을 자던 텐트 위에 눈이 너무 많이 쌓여 텐트가 무너 지는 바람에 잠자던 장병 수십 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제 7사단장 재임 시절에는 장병들의 겨울 피복을 보관 중이던 창고에 서 불이 나 옷이 몽땅 탔다. 사단장으로서 문책을 당해 당장 옷을 벗어야 할 정도의 대형 사고였지만 송요찬 사령관은 박정희를 감 싸주었다. 장면 총리는 새로 임명한 최영희 참모총장을 불과 3개월 만인 8 월 23일 전격 교체했다. 후임 총장에 임명된 최경록 장군은 6·25 때 전투도 잘했고 사적(私的)인 감정이 전혀 없었으며 원리원칙에 충실한 성격이었다. 하우스만은 최영희 장군의 성격상 그가 계속 육군참모총장 자리에 있었다면 부하 장교들의 쿠데타 계획에 대해 162 -박정희정신 2017. 05/06 Vol. 3 적당히 넘기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증언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최경록 장군도 재임 6개월 만인 1961년 2월 해임되고 2월 17일자로 장도영 장군이 새 총장에 임명됐다. 육군의 최고 지휘부인 참모총장이 몇 개월 주기로 교체되면서 육본 참모진 은 물론 사단장, 참모장을 비롯한 예하의 각급 장교들이 자고 일어 나면 바뀌었다. 이 혼란스러운 시기에 박정희는 별 두 개를 달고 육본 작전참모 부장으로 부임해 왔다. 하우스만은 육군본부의 요직 중의 하나인 작전참모부장에 임명된 박정희 장군의 방을 분주히 드나들며 인간 관계를 쌓게 된다. 미군이 박정희 소장의 일거수일투족에 비상한 관심을 가진 이유 가 있다. 박정희가 부산 군수기지사령관으로서 부산지구 계엄사령 관으로 활동하던 시절 학생 시위 지지 연설을 했다. 이 사실을 보고 받은 육본은 인근 지역의 해병대를 출동시켜 박정희를 견제해야 한 다는 의견이 나왔기 때문이다. 게다가 박정희는 자신을 아꼈고, 한직으로 돌던 자신에게 사단 장의 길을 열어준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 송요찬 장군을 “부 패 군인의 표본”이라면서 용퇴를 하라는 편지를 한 사실이 알려지 면서 하우스만은 박정희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관찰하기 시 작했다. 솔직히 말하면 시중에 나도는 쿠데타설의 진위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두 사람이 만나 대화를 할 때면 박정희는 늘 하우스만이 탁자에 꺼내 놓은 담배를 마구 꺼내 줄담배를 피웠다. 하우스만은 박정희 가 여순 반란 진압작전 때부터 술 담배를 많이 했다고 기억한다. 하우스만, 사형 위기의 박정희 살려내다- 163 “박정희는 동료나 상사들이 술을 산다고 하면 거절하는 법이 없었 고, 술만 얻어 마시는 것이 아니라 술을 사는 사람의 담배까지 즐거 이 피워댔다”는 것이다. 특히 술자리에서 자주 어울렸던 장교는 하 우스만의 통역이었던 고정훈과 김점곤, 장도영 등이었다. 김점곤은 박정희가 춘천 8연대 소대장 시절 그의 직속상관(중대 장·중위)이었으나 박정희보다 나이가 7살이나 아래였고, 박정희 가 육본 정보국 과장 시절 정보국장이었으며 5·16 당시 육군참모 총장이었던 장도영은 박정희보다 3살 아래였다. 박정희로부터 “술 좀 사시오”, “담배 한 대 주시오”라는 말을 자 주 들었던 상사 중의 하나가 김점곤이었다. 얼마 안 되는 육군 소위 월급을 고스란히 시골 노모에게 송금하고 있었던 박정희는 전라도 갑부의 아들이었던 김점곤에게 스스럼없이 그런 말을 하곤 했다. 매그루더, 장도영에게 “쿠데타 조심하라” 경고 하우스만은 4·19 이후 박정희 소장이 청렴하고 똑똑한 장군으 로 장교들에게 명망을 얻고 있었으며, 그를 따르는 8기생을 비롯한 다수의 근위사단들이 만들어져 있었다고 증언한다. 쿠데타가 발생 하기 45일 전, 여러 루트를 통해 박정희의 쿠데타와 관련한 구체적 인 증거와 물증을 확보한 하우스만은 상부에 “한국군 내에 쿠데타 기도가 있음”이란 사실을 보고했다. 하우스만의 보고를 받은 매그루더 주한미군 사령관은 장도영 육 군참모총장에게 적어도 한 차례 이상 “군 내부의 쿠데타 기도를 주 164 -박정희정신 2017. 05/06 Vol. 3 의하라”는 경고를 했다. 이에 대해 장도영은 “걱정 마시오. 한국군 에 관한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 같은 것은 하지 않아도 됩 니다”고 답했다. 하우스만은 장도영의 인물 됨됨이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장도 영은 잘 생기고 영리하며 대외관계가 무난했으나 그는 너무 정치적 인 인물이었다. 장도영은 6·25 전쟁 때 제9사단장 재임 시절 현리 전투에서 중공군의 공격을 받고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졌다. 참혹 한 패전 후 부대 전체가 머리를 삭발하는 등 와신상담하여 대 반격에 나서 큰 전과를 올리기 도 했다. 장도영에 대한 하우스 만의 증언을 옮겨본다. ‘전쟁이 그치자 그(장도영)는 아내 엘렌과 함께 전진, 정치적 후퇴, 전진 작전을 열심히 했 다. 이기붕 씨의 서대문 자택을 부지런히 드나들었다. 엘렌은 박마리아(이기붕의 아내)를 어머니처럼 모시고 매주 일요일 교회에 출석했다. 그는 말하자면 탄탄한 정치선을 대고 일약 출세 길을 걸 었던 것이다. 장도영은 자유당이 무너지고 민주당 정부가 들어선 후에도 정치와의 줄을 탄탄히 맬 수 있었다. 참모총장에 임명되는 때도 이한림과 경쟁이 붙었는데 선임자 관 계, 군 경력 등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이한림이 총장이 될 줄 알았으 나 장이 결국 총장에 임명됐다. 그가 어떻게 총장이 될 수 있었는가 하우스만은 당시의 한국 정치 는 군사 쿠데타를 기다리고 있 는 형국이었다고 표현했다. 그 러기에 5월 16일 아침 하우스 만이 용산 육군본부 내 육군참 모총장실 앞에서 짙은 색 선글 라스를 쓴, 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박정희 장군을 만났을 때에도 별로 놀라지 않았다. 닥 칠 일이 닥쳤기 때문이다. 하우스만, 사형 위기의 박정희 살려내다- 165 에 대해서는 부인이 뛰었다느니 현석호 국방장관이 밀었다느니 하 는 등 여러 가지 소문이 있었으나, 어쨌든 정치를 잘 아는 그의 재 능이 총장 취임을 가능케 했던 것은 틀림없었던 것이다.’3) 하우스만에게 쿠데타 정보를 제공한 인물은 김형일 참모차장이 었다. 제7사단장, 특무부대장, 제2군단장, 육군참모차장을 역임했 던 김형일은 박정희를 좌익 성향이라면서 싫어했다. 4·19로 이승 만 정권이 무너진 후 민주당이 집권하자 이종찬 장군은 장면 총리 를 찾아가 박정희 장군을 중용하라고 건의했다. 장면 총리는 이와 관련하여 매그루더 주한미군 사령관에게 의논했고, 매그루더는 한 국 육군본부에 박정희의 신원조회를 요청했다. 쿠데타 계획 미국에 알린 사람은 김형일 육군참모차장 당시 육군참모차장 김형일은 매그루더에게 “박정희는 레프트 다”, 즉 좌익이라고 답했다. 매그루더는 장면 총리에게 “사상적으 로 문제가 있는 사람을 어떻게 육본 작전참모부장이라는 요직에 임 명했는가” 하고 이의를 제기했다. 그 직후 박정희는 요직에 중용은 커녕 2군 부사령관으로 좌천성 전출 명령을 받았다. 김형일 장군은 박정희가 중심이 되어 은밀하게 추진 중이던 쿠데 타 움직임에 대해 상세히 알고 있었으나 하우스만에게 정보를 제공 3) 제임스 하우스만·정일화 공저, 앞의 책, 61쪽. 166 -박정희정신 2017. 05/06 Vol. 3 한 외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입을 열지 않고 모든 내용을 무덤까지 가지고 갔다. 하우스만은 당시의 한국 정치는 군사 쿠데타를 기다리고 있는 형 국이었다고 표현했다. 그러기에 5월 16일 아침 하우스만이 용산 육 군본부 내 육군참모총장실 앞에서 짙은 색 선글라스를 쓴, 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박정희 장군을 만났을 때에도 별로 놀라지 않았 다. 닥칠 일이 닥쳤기 때문이다. 하우스만은 박정희에게 있어 5·16은 세 번째 쿠데타 시도였고, 세 번 만에 실제로 성공을 거두었다고 말한다. 그가 기억하는 첫 번 째 쿠데타 시도는 1952년 5월 부산의 정치파동 때 이용문 장군을 앞세워 거사를 하려는 것이었다. 이용문 장군은 1952년 6월 24일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는데, 하우스만은 이 장군의 죽음에 대해 강 한 의문을 제기했다. 사고 원인이 연료 부족으로 인한 추락으로 밝 혀졌는데, 이 문제와 관련하여 하우스만은 “누군가가 휘발유를 고 의로 뽑아버렸든지 아니면 무슨 폭발물을 장치했는지 모른다”고 증언하고 있다. 두 번째 쿠데타 시도는 1960년 4월 12~13일께 부산 군수기지사 령관으로 재직 시절 때였다. 하우스만은 이 무렵 박정희 장군은 전 두열, 김동하(포형지구 해병대 사령관), 윤태일(안동 예비사단장), 이주일(장도영 2군사령관의 참모장) 등을 부산에 불러 구체적인 거 사일정을 짰고, 혁명공약도 3~4개 항을 만들었다. 당시 쿠데타가 실행되지 못했던 이유는 당시 육군참모총장이 송 요찬 장군이었는데, 송 총장은 박정희에게는 은인과 같은 인물이어 서 그에게 총을 들이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침 송요찬 장군이 5 하우스만, 사형 위기의 박정희 살려내다- 167 월 5일 미국을 방문하게 되어 있어 그가 떠난 후 거사를 하는 것으 로 결정했는데, 송요찬 장군의 미국행을 기다리던 중 4·19 혁명이 먼저 터져 기회가 사라져 버렸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박정희가 부산 군수기지사령관 시절 취재기 자였던 김종신은 귀중한 증언을 남겼다.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기 이틀 전인 1960년 4월 23일 동래 범어사에서 3·15 부정선거에 항 거하다 쓰러진 젊은 학도들의 위령제가 거행되었다. 이날 위령제는 예측불허의 정치적 상황에서 국민감정을 무마하기 위해 마지못해 거행하는 형식이었다. 따라서 이 행사에 참석한 경남지사, 부산시장을 비롯한 부산 경 남 일대의 유력 인사들은 직언을 피하고 어물어물하며 상투적인 내 용으로 얼버무렸다. 그런데 부산 군수기지사령관 박정희 장군은 다 음과 같은 조사(弔辭)를 읽어 내려갔다. “…이 나라의 진정한 민주주의의 초석을 위하여 꽃다운 생명을 버린 젊은 학도들이여!… 여러분의 애통한 희생은 바로 무능하고 무기력한 선배들의 책임인 바, 나도 여러분 선배의 한 사람으로서 오늘 같은 비통한 순간을 맞아 뼈아픈 회한을 느끼는 바입니다. …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흘린 고귀한 피는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한 연유로 오늘 여러분들의 영결은 자유를 위한 우리들과의 자랑스러운 결연임을 저는 확신합 니다. …여러분들이 못 다 이룬 소원은 기필코 우리들이 성취하겠 습니다. 부디 타계에서나마 영일의 명복을 충심으로 빕니다.”4) 4) 김종신, 『영시의 횃불』, 한림출판사, 1966, 47쪽. 168 -박정희정신 2017. 05/06 Vol. 3 비록 학생들의 부정선거 항의 시위로 위기에 처하긴 했지만 아직 도 자유당의 서슬이 시퍼렇던 때여서 박정희 장군의 이날 발언은 센세이셔널한 충격파를 던졌다. 당시 부산일보 사회부 기자였던 김종신은 “만약 자유당이 계속 집권했다면 군사혁명은 1961년 5월 16일보다 훨씬 이전에 이루어 졌을 것”이라고 증언했다. 이미 4·19가 일어나기 전에 쿠데타에 대한 상세한 계획은 물론 거사날짜를 1960년 5월 8일로 잡아놓았 었다는 것이다. 그해 5월 7일은 마침 육군참모총장과 몇몇 군 수뇌 들이 도미 시찰을 가기로 되어 있어 그 이튿날 상부의 감독이 소홀 해진 틈에 거사하기로 했다.5) 그런데 4·19가 발발하여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면서 박정희 장 군은 쿠데타 계획을 포기했다고 밝히고 있다. 김종신의 기록은 하 우스만의 증언과 거의 일치한다. 문화방송의 전응덕 보도과장은 당 시 박정희 군수기지사령관이 위령식에서 행한 조사 전문을 녹취한 녹음테이프를 혁명 거사 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게 기 념품으로 증정했다. 박정희, 하우스 장군과의 대화 결렬 하우스만은 5월 16일 이른 아침 용산의 육군본부에서 쿠데타를 현장 체험했다.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의 명에 의해 쿠데타군의 한 5) 김종신, 앞의 책, 52쪽. 하우스만, 사형 위기의 박정희 살려내다- 169 강 도하를 봉쇄하기 위해 출동했던 헌병 제7중대 병력은 쿠데타군 의 강력한 저항에 밀려 육본으로 철수했다. 그들이 본부 건물 앞 에 수송 차량을 동원하여 바리케이트를 치던 중 쿠데타군이 들이 닥쳤다. 하우스만은 아수라장이 된 육군본부의 육군참모총장실로 가는 길에 쿠데타 지휘자 박정희 장군과 마주쳤다. 두 사람은 손을 흔들 어 인사를 하고 헤어졌는데, 이 짧은 만남 이후 연락관(한국군 대 위)을 통해 두 사람은 수많은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매그루더 사령관은 고문단장 하우스 소장을 한국군 사령부에 파 견해 쿠데타 지도자와의 면담을 시도했다. 하우스 장군은 미 육사 (웨스트포인트)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철저하게 규율을 지키 는 것으로 명성이 자자하여 ‘미스터 육군’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하우스 장군은 매그루더 사령관으로부터 “정치 문제에는 절대로 개입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고 육군참모총장 집무실에서 박정희 장군과 만났다. 이 자리에서 통역을 매개로 하여 박정희, 장도영, 하우스 3자 대화가 진행되었다. 하우스만 증언록에 나오는 당시 정 황이다. 하우스 : (박정희에게) “왜 당신은 여기에 왔는가.” 박정희 : “우리는 장도영 참모총장에게 우리의 군사혁명을 이끌어 달라는 요청을 하기 위해 왔다.” 하우스 : “만일 장 참모총장이 이를 거절하면 어떻게 하겠는가.” 박정희 : “만약 거절한다면 우리는 모든 적절한 조처를 취해 참모 총장직을 접수할 것이다.” 170 -박정희정신 2017. 05/06 Vol. 3 하우스는 불쾌한 표정을 지었고, 박정희는 하우스와의 대화를 통 해서는 얻을 것이 없다고 판단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을 나 갔다. 하우스 장군의 이날 아침 방문 이후 미국과 쿠데타 지휘부의 공식 대화 채널은 끊어졌다. 장면 총리는 행방이 묘연한 상태였고 (사실은 혜화동 수녀원으로 피신), 쿠데타군은 아직 정부를 장악하 지 못한 상태였다. 주한미군 수뇌부와 쿠데타 지휘부가 서로 당황하고 있을 때 군사 혁명위 소속 한국군 대위가 하우스만의 사무실을 찾아와 박정희 장 군의 쪽지를 전했다. 쪽지에는 ‘하우스만 씨, 나를 도와줄 수 없겠 는가?’라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하우스만은 이 쪽지를 계기로 미 군과 박정희 사이의 중재자로 나서게 된다. 박정희는 쪽지나 연락 장교를 통해 하우스만에게 “미8군의 입장은 어떤가”, “미국의 시각 은 어떤가” 등을 물어오는 등 광범위한 대화를 이어갔다. 박정희에게 “감투를 써야 한다” 조언 당시 쿠데타의 주역은 박정희 소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 정희는 어떠한 공식 직책도 맡지 않은 상태였다. 반면에 쿠데타에 대해 찬성도 반대도 않고 어정쩡하게 양다리를 걸쳤던 장도영은 육 군참모총장 외에 국방부장관, 내각 수반,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등 네 가지 요직을 겸직하면서 혁명정부의 1인자로 부상했다. 실질적 인 병력 동원의 권한이 장도영에게 넘어가버린 것이다. 이것이 큰 문제를 야기할 지도 모른다고 판단한 하우스만은 최 하우스만, 사형 위기의 박정희 살려내다- 171 고회의 소속 한국군 연락장교를 통해 “박정희 장군이 적어도 한 개 이상의 공식적인 최고 직책을 가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불행 하게도 연락장교는 장도영 측 사람이었다. 더구나 하우스만과 장 도영은 오래 전부터 가족들끼리 한 집안 식구처럼 어울린 절친한 관계였다. 이 와중에 하우스만이 박정희에게 “장도영의 감투를 빼앗아 써야 한다”고 장도영 측 사람에게 말했으니 장도영과는 인간관계가 틀 어져버렸다. 박정희가 미8군 캠퍼스 안의 하우스만 자택을 방문한 것은 5월 18일이었다. 박정희 장군이 ‘한국의 지장(智將)’으로 알려진 강문봉 장군과 함께 하우스만을 찾아왔다. 이날 박정희는 대화를 진행하며 연속으로 줄담배를 피웠다. 마침 박정희의 라이터에 기름이 떨어 져 불이 붙지 않자 하우스만의 아들 자미가 라이터 기름을 갖고 와 부어주었다. 딸 베티는 코카콜라 세 잔에 얼음을 넣어 세 사람 앞에 놓았다. 지미가 라이터에 기름을 채우고 있는 동안 박정희는 강문봉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이 사람이 참모총장이 돼야 하는데…” 하고 말했다. 인사가 끝나자 하우스만은 박정희에게 “당신은 모자를 써야 한다 (공식 직위를 가져야 한다는 뜻-필자 주). 그리고 그 짙은 색안경 도 벗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했다. 박정희는 선글라스를 벗어 테이 블 위에 놓았다. 이날 박정희는 군사혁명과 관련한 광범위한 주제 로 대화를 나누었다. 매그루더 사령관의 반(反)쿠데타 태도에 관해 서도 이야기했다. 172 -박정희정신 2017. 05/06 Vol. 3 이날 박정희가 하우스만을 방문한 목적은 자신의 공산당 전력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여순 반란 진압 작전에서 돌아온 후 공산당 연루 혐의로 체 포됐는데, 사실은 공산주의자가 아니고….” 이 대목에서 하우스만은 박정희의 발언을 가로막았다. 이유가 무 엇이었을까. 하우스만은 당시 정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미 한국의 실질적 지도자가 돼 있는 분으로부터 스스로도 돌 아보고 싶지 않을 과거를 말하게 한다는 것, 더군다나 그것을 무릎 을 맞대고 듣는다는 것은 예의에 벗어나는 일 같기도 했다. 아니 그 보다도 나는 그 사건을 본인 못지않게 잘 알고 있었다. 사실 5·16 직후부터 박정희에 대한 얘기가 나올 때마다 “그는 공산주의자가 아닌가”라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그 행 위를 반대하기 위해 그의 전력을 새삼 들춰내는 인물도 있었다. 나는 박(朴)을 여순반란사건 진압 작전 때 만난 일이 있었으며 그 가 작전참모부장을 할 때는 상당한 깊이의 얘기도 한 바 있어 비교 적 그의 출신 성분, 성격, 군인으로서의 능력, 국가에 대한 봉사, 정열, 이런 것들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박이 숙군 작업에 걸려 중 죄를 선고 받고 풀려나는 과정에서 이미 주장했던 변론들을 8군 지 하벙커에서 여러 번 되풀이한 일이 있었다.’ 6) 박정희는 하우스만의 딸 베티가 갖다 놓은 콜라의 얼음이 다 녹 아 멀겋게 되어도 입도 대지 않은 채 생각에 잠겼다가 정중하게 입 6) 제임스 하우스만·정일화 공저, 앞의 책, 59~60쪽. 하우스만, 사형 위기의 박정희 살려내다- 173 을 열었다. “하우스만 씨, 나를 위해 미국에 좀 갔다 오지 않겠소.” 이 말에 하우스만은 대답 대신 빙긋 웃었다. 그리고 자기 방에서 미국행 항공 티켓을 가져다 박정희에게 보여주었다. 사실 다음날 하우스만은 공무 겸 휴가로 남의 눈에 띄지 않게 미국으로 가서 한 국 사태의 자초지종을 본국 정부에 보고할 예정이었다. 박정희는 놀라는 표정도 없이 “잘 부탁하오” 라고 말했다. “미국이 당신을 적으로 돌릴 이유는 없다” 다음날 워싱턴으로 날아간 하우스만은 도착 즉시 미 합참의장 라 이먼 렘니처 장군에게 한국 사태에 대해, 그리고 쿠데타 지도자 박 정희에 대해 상세하게 보고했다. 렘니처 장군은 쿠데타가 일어나 기 직전 한국을 방문, 한국 측 합참의장인 김종오 대장의 안내를 받 았다. 그런데 김종오 장군은 렘니처에게 쿠데타에 대해 일언반구도 말하지 않았다. 렘니처가 김포공항을 떠난 바로 다음날 쿠데타가 발생했기 때문 에 김종오 장군이 뭔가를 속였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하우 스만은 김종오 장군은 쿠데타 기도를 사전에 알지 못했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이어 하우스만은 조지 H 데커 육군참모총장, 미 중 앙정보국(CIA), 국무부를 비롯한 요로에 한국 사태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당시 미 정부는 박정희의 쿠데타군을 무력으로 진압할 것인지, 174 -박정희정신 2017. 05/06 Vol. 3 아니면 그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킬 것인지, 아니면 묵인할 것인지를 두고 국무부와 국방부의 견해가 일치하지 않았다. 또 국방부·육 군·합참 내에서 상당한 견해차가 있을 때여서 하우스만의 보고는 한국 사태 파악 및 정책 방향 설정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당시 의 보고에 대한 공으로 하우스만은 미 국방장관으로부터 장문의 공 적서와 함께 국방장관 공로표창을 받았다. 박정희의 쿠데타에 대한 미국의 묵시적 지지를 이끌어내는 데 있 어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이 바로 하우스만이다. 하우스만은 1948년 박정희의 구명운동에 이어 쿠데타 성공까지를 담보해 주었 다. 게다가 케네디 대통령과의 정상회담도 주선하여 미국 정부의 확고한 지지를 이끌어내는 역할을 함으로써 박정희에게는 은인 중 의 은인이 되었다. 한 달 여 미국에 체류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하우스만은 박정희에 게 “미국은 당신의 친구”라는 점을 확실하게 설명했다. 물론 “귀하 가 혁명 공약에서 강력히 내건 것처럼 반공 개념을 확실히 하고 경 제 발전을 정치의 주목표로 삼는다면”이란 단서가 붙어 있었다. 그 렇게만 될 경우 “미국이 당신을 적으로 돌릴 이유는 없다”는 점을 분명하게 설명했다. 하우스만은 박정희 의장이 미국을 방문할 것,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 첫째, 미국의 주요 이익을 거스르지 않을 것이란 점, 둘째 민 주주의의 기본 테두리를 확실하게 지킬 것이라는 두 가지를 약속하 는 것이 좋겠다고 설명했다. 그 결과 박정희의 방미 일정이 잡혔고, 박정희는 미국의 지지를 받아 제3공화국이 출범하게 된다. 174 -박정희정신 2017. 05/06 Vol.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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