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 3화를 보았는데, 이 드라마가 던지는 묵직한 메시지에 밤을 새버렸다. 두 주인공의 마음이 엇갈릴까봐 내내 안절부절했다. 울고 웃다가 4화를 남겨두고 잠이 들었다. 그런데 이 드라마가 16부작이라고 한다. 아직 남아 있는 13개의 이야기가 짐작도 가지 않는다. 뒷조사를 해보니 '동백꽃 필 무렵'의 작가가 썼다고 한다. 생생하게 살아있는 캐릭터와 세밀하게 엮어진 이야기의 힘... 지금도 전율이 흐른다. 최근에 본 어떤 이야기보다 강렬하다. 미키 17을 단번에 잊을 만큼.
극 속 아이유는 너무 사랑스럽다. 세상 풍파, 외로움, 따돌림 다 겪으면서도, 울면서도 할 말은 다한다. 그녀에게만 일편단심인 박보검은 어떤가. 험한 인생살이에 저런 배우자나 친구가 있다면 한 번 살아볼만한 삶이 되지 않을까. 사실 박보검이 아이유에게 다시 돌아오는 장면은 판타지에 가깝다. 이미 아득해진 배에서 뛰어내려 뭍으로
올라오다니. 하기야 극중 설정이 조오련에 가까우니 가능할 수도 있을까? 그런데 그런 의구심 따윈 이 큰 이야기에서 소소한 티일 뿐이다.
극 중 아이유는 아빠 없이 살다가, 새아빠랑 살다가, 억척스런 엄마마저 세상을 떠나자 배 다른 동생들 셋을 거둬 먹이느라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다. 그런 그에겐 매일 삼치며 전복이며, 행여 아이유가 불행해질까봐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박보검이 있다. 10년을 따라다닌 끝에 이들은 야반도주를 결심한 후 배를 타고 부산으로 도망을 간다. 비록 이틀 만에 제주도로 돌아오지만 아이유 뱃속엔 이미 생명이 잉태하고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일본 드라마 '핫스팟: 외계인 출몰 주의'란 드라마를 보았다. 마치 진라면 순한맛, 아니 사리곰탕면에 가까울 정도로 심심한, 그러나 디테일하고 새로운 이야기였다. 외계인이 능력을 쓰면 관절염에 걸리는 등 굽은 아저씨라니. 심지어 나와 나이가 같은 설정이라니. 그에 비하면 '폭싹 속았수다(정말 수고하셨다는 의미다)'는 불닭볶음면인데 크림이 들어간 핑크색 버전이다. 맵지만 달콤하고, 강렬하지만 시원한 맛이다. 아침 저녁 교대로 먹어도 좋을 만큼 전혀 다른 이야기다. 그러나 두 이야기 모두 사랑스럽다.
나는 그닥 도덕적인 사람이 아니다. 학교도 졸업 안한 어린 것들이 집을 나와 임신까지 했는데도 사랑스럽다. 뭐 사람이 다 그런거지, 본능에 충실한 거지, 그걸 우째 말리노 하는 생각까지 든다. 이것이 사람 사는 이야기니까. 그러다보니 문득 최욱과 정영진이 나오는 '웃다가' 생각이 다 또로록 떠오른다. 그들도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 성적인 매력, 바람의 DNA를 가지고 운명적인 상대를 찾겠다는데 너무 비난하지 마라. 그런데 왜 나는 이 유튜브 채널은 이렇게도 불쾌하고 싫은 것일까.
나는 그것이 삶을 대하는 자세, 즉 애티튜드attitude의 차이에 있다고 본다. 자신의 삶과 상대방에 대해 진지한 사람들은 뭔 짓을 해도 아름답다. 아이유는 10년을 따라다닌 박보검이 불행해질까봐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한다. 내 눈 앞에서 없어져야 행복해진다고. 하지만 '웃다가'는 이런 삶의 비극 중 한 장면을 가져와 히히덕 거리는 것으로 끝난다. 그런 자세로는 불륜을 비판하든 미화하든 별 차이가 없다. 내게 최욱이란 인물은 탈모인의 마음을 걱정할 정도로 아주 신중하게, 그럼에도 웃길 줄 아는 멋진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 방송을 보고 나는 마음을 접었다. 한 가정의 비극을 그렇게 웃음거리로 난도질하는 사람의 팬으로 살고 싶진 않아서다.
'폭싹 속았수다'는 마치 칼칼한 갈치조림, 낚지볶음처럼 맛있게 맵다.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지만 뒷끝이 없는 매운 맛이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지고, 더 열심히 사랑하며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한다. 하지만 '웃다가'는 삶을 대하는 아주 가볍고 얄팍한 자세 때문에 막상 볼 때는 즐겁지만 뒷맛이 영 개운치 않다. 10년 전 여론 조사에 의하면 배우자의 외도를 용서하겠다는 사람은 전 연령대에서 10% 정도였다. 그렇다면 지금은 그 비율이 달라졌을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단지 내로남불, 나는 괜찮지만 상대방은 안된다, 라는 의견이 다수일 것이다.
'폭싹 속았수다'는 그 어떤 가르침, 이른바 계몽이 없는 드라마다. 비현실적이고 만화적인 캐릭터지만 사람 냄새가 난다. 딸을 두고 죽지 못해 예쁘게 차려 입고 비싼 전복을 먹이는 어미를 보고 어떻게 눈물짓지 않을 수 있을까. 이 드라마에선 심지어 악역을 맡은 사람들조차 팔딱 팔딱 숨을 쉬며 웃음을 자아낸다. 이런게 진짜 맛있는 매운맛이다. 그러나 '웃다가'의 최욱과 정영진은 다른 누군가가 피눈물 흘릴 일을 아주 가볍게, 장난처럼 다루며 웃음을 강요한다. 그리고 나의 이런 비판에 그들은 아무런 답이 없다. 그래서 조금 화가 난다.
그래서 나는 나쁜 이야기에 화내기보다 좋은 이야기에 더 많은 눈물을 흘리기로 작심을 했다. 드라마 속 아이유를 떠올리며 내게 주어진 환경에 투덜대기보다 감사하기로 했다. 박보검처럼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좀 더 우직하게 견뎌보기로 했다. 삶은 힘들다. 좋은 일보다는 나쁜 일이 더 많이 닥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도 나는 지난 50년 가까이 그럭저럭 잘 견뎌왔다고 스스로를 토닥이고 싶다. 나라고 말 못할 힘든 일이 왜 없었겠는가. 그럼에도 이 드라마를 보고 내 소중한 것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됐다. 감사하다
....내게는 아직도 13개의 더 볼 이야기가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