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잔잔히 밀려들어 마침내 붕괴시키는

영화

<헤어질 결심, 2022> - 잔잔히 밀려들어 마침내 붕괴시키는

카시모프 0 81,555 2022.06.30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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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사람도 있지만, 잉크가 물에 떨어지듯 서서히 퍼지는 사람도 있어"


우리가 감정에 대해 이야기할 때, 서로 다른 방식으로 다르게 느낀다는 것을 어릴 때는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내가 정의한 슬픔, 기쁨, 노여움, 허무함, 그리고 사랑과 같이 이름 매긴 감정의 선이 다를 때 오해가 쌓이고 관계가 어그러진다. 내가 생각하는 사랑은 이런 것이고 이렇게 표현하는데, 당신이 생각하는 사랑은 저런 것이고 저렇게 표현하는 것이라니. 서로 다른 감정의 이름들은 우리가 서로 다른 부류의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다. 감정과 사고와 반응의 구조가 다르면, 아무리 외모나 섹스나 조건이 좋아도 결국에 서로 닿지 않는 끈인 것이다.


그에 반해 같은 부류의 사람이라면, 서로 어떻게 사랑에 빠지게 되었는지 그 시작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서로가 서로에게 스며든다. 그 감정과 관계엔 이름을 지을 필요도 없다. 무엇을 하라 요구할 필요도 없다. 단어 하나, 손짓 하나에도 같은 것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은, 그렇게 같은 부류의 사람과 다른 부류의 사람이 소통하고 사랑하는 방식에 대한 영화다. 처음 영화가 공개할 때, 박찬욱 특유의 섹스와 폭력에 대한 장면이 나오는지에 대해 질문이 있었는데 이 영화엔 그런 장면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단순히 자극적이지 않은 장면을 뺐다기보다, 그것이 영화의 주제에 더 걸맞은 연출이었기 때문에 한 일이었다. 이전의 박찬욱 영화는 예리하고 무거운 칼날 같은 영화였다. 이야기의 감정을 극단으로 치닫게 하고, 예리하게 다듬어진 미장센으로 관객의 마음을 베어버리기까지 했다. 그것은 파도같이 거대하게 다가와서 힘으로 한 번에 부수어버리는 힘이 있었다. 


그러나 <헤어질 결심>은 그렇지 않다. 해준(박해일)과 서래(탕웨이)는 형사와 피의자로 만났지만, 서로가 같은 부류의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서로 딱히 어떤 말이 없어도, 다른 사람들이 보면 이상하게 보일 대사와 행동이라도, 서로가 서로에게 오해의 여지가 없게 되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스며든다. 잉크가 물에 퍼지듯. 박찬욱은 예리하게 마음을 도려내기보다, 슬픔이 서서히 퍼지게 만드는 영화를 만들었다.


나는 다른 부분보다, 서로 같은 부류와 다른 부류를 나누게 되는 그 시선에 매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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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시점으로 물드는 시선

이 영화엔 유난히 '망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처음 벼랑에서 떨어져 죽은 탕웨이의 남편 기도수의 시선, 해준에게 쫓기다 자살한 홍산오의 시선, 탕웨이 엄마 유골함의 시선, 심지어는 어시장에서 죽어있는 물고기의 시선도 있다. 해준은 '망자가 본 마지막 사람이 범인일 텐데, 그 눈으로 본 사람은 누구였을지 생각한다'라고 했다. 그런데 정작 두 죽은 시체는 해준을 보고 있다. 당연히 해준은 형사이므로 둘을 직접적으로 죽인 게 아니다.  하지만 당연히 관련이 없지 않다. 


또 디지털 기기의 시선 역시 재미있다. 우리는 서로 메시지를 주고받을 때, 마치 폰 너머에 상대방이 있듯이 대하고 또 감정이 생긴다. <헤어질 결심>에서는 종종 디지털기기 안에서 사용자를 바라보는 시선을 하는데, 텍스트를 보낼 때 혹은 메시지를 기다릴 때 등에서 사용자가 어떤 마음일지 볼 수 있게 된다. 


해준이 잠복해 서래를 망원경으로 관찰하는 부분에서는, 멀리서 창문을 통해 관찰하다 순간 카메라가 그 안으로 훅 들어가 버린다. 3인칭 관찰자의 입장에서 2인칭까지. 서래의 동작 하나하나를 마치 자신의 이야기인양 옆에서 바라보고 이입한다. 영화의 카메라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주요 장면에서 마치 관객이 망원경으로 영화 주인공들을 바라보듯, 멀리서 핸드헬드로 줌인해 들어간다. 한 번에 먼 거리를 어설픈 움직임으로 줌인해 들어간 곳에서 죽음부터 사랑까지 관찰된다. 


시점의 변화로 인해 이 이야기가 1인칭이었다가, 2인칭이었다가, 3인칭으로 자꾸 변화한다. 그러는 중에 우리가 관찰하던 이 두 사람의 이야기는 어느새 내 이야기가 되어버린다. 잠복근무하며 서래를 보는 해준의 마음처럼, 바라보고 바라보다 서서히 물드는 것이다. 모호한 시점 속에 그의 감정은 내 감정이 되고, 정의 내릴 수 없던 많은 이야기와 장면은 천천히 맞춰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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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방식이 기존의 멜로 영화와 조금 다른 부분이기 때문에, 이런 어법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감정선이나 내용 자체가 잘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다. 어떻게 보면 흔한 멜로 영화보다도 명확하게 캐릭터의 감정선을 제대로 못 보여주는 듯도 하다. 사랑, 불륜, 분노, 이별, 슬픔 같은 거 말이다. 영화의 문법들은 이젠 너무나 체계가 잡혀있어서, 관객에게 '여기서 울어!' '여기서 웃어!' '여기서는 사랑을 느껴!'라고 친절히 머리에 넣어준다. 하지만 <헤어질 결심>은 그렇지 않다. 웃어야 할 곳이 아닌데 웃기고, 분노 속에 슬픔이 느껴지며, 이별 속에 사랑이 피어난다. 모호함이 모여, 남들이 정의 내리지 않았던 사랑의 모습이 완성된다.


"당신의 사랑이 끝났을 때 나의 사랑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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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잔히 밀려들어 마침내 붕괴시키다

흔히 박찬욱 같은 '영화적인 영화'를 만드는 감독의 영화를 보면, 너도 나도 상징과 복선을 찾아 해석하고 연결하기 바쁘다. <헤어질 결심>에서도 너무나 선명하게 드러나는 산과 바다와 안개, 드레스와 가발의 모양과 색, 대사의 뉘앙스와 장면의 연결과 편집 등 해석할 것들이 수도 없이 많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감독이 어떻게 의도했든, 관객에게 선보인 이후의 해석은 관객에게 달린 것이다. 따라서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같은 걸 느낄 수도 있고,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은 다른 걸 느낄 수도 있다. 이런 방식의 영화를 흔히 어려워하는 이유는 '감독이 정말 원하던 하려는 이야기가 뭐지?'에 매달려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다. 그 지점에서 내가 이런 걸 느꼈다면, 그것이 나에겐 정답인 셈이다. 


영화관에서 이 영화를 보며, 나는 내내 그 코믹한 연출에 웃었다. 특히 나를 가장 웃게 한 장면은, 해준의 동료인 수완이 폭력적인 취조를 해 책상을 뒤엎을 때 바닥에 같이 떨어진 안마기구다. 평소에 안마기구를 들고 다니며 종종 해준의 목을 안마해주기도 하는데, 화난 수완이 그 안마기구를 들고 상대방을 협박했을 걸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뜬금없이 웃음이 터졌다. 그 밖에도 여러 곳에서, 영화가 극으로 치닫는 와중에도 감독은 내내 웃음을 선사한다. 그래서인지 슬픈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가볍고 재미있게 접근할 수 있었다.


서래의 산이 무너지고 바다가 되는 장면 후에, 나에게도 먹먹함이 밀려들어왔지만 '예전 박찬욱이면 더 깊은 감정을 보여주지 않았을까'라는 아쉬움이 남았었다. 여기서는 이렇게, 저기서는 저런 감정을. 또 이런 상징이 이런 식으로 들어갔다면? 아, 이 부분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했구나라고 곱씹게 되었다. 내 안에 남은 게 즐거움인지 기쁨인지 슬픔인지 허무함인지 알 수 없는 단계에서, 영화를 곱씹게 되는 동안 영화는 내 가슴속에 계속해서 밀려들어왔다. 그제야 나는 감독이 이런 영화를 만들고 싶었구나라고 느꼈다. 해준이 서래를, 서래가 해준을 곱씹으며 잉크가 번지듯 서서히 사랑이 번져가고 슬픔이 번져갔듯이, 나 역시 영화를 곱씹으며 내 안에 번져가는 영화.


모호한 말들과 상징과 이야기와 대사와 시점이 겹치고 겹치며, 계속해서 되뇌이며 그것들은 이내 나의 이야기가 되었다.

그리고 한참 후에 글을 쓰는 지금, 내 가슴의 산이 붕괴되는 걸 느낀다.

마침내.

 

 

 

출처: 본인 브런치 https://brunch.co.kr/@casimov/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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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오유-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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