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재위 기간 1155년~1190년)의 제국군, 1154~1176년
1: 제국 군대
1176년 5월 29일 이탈리아의 롬바르디아주 근처 레냐노에서 일어난 프리드리히 1세의 신성로마제국과 롬바르디아 동맹(이탈리아에 지배력을 행사하려던 신성로마제국에 맞서기 위해 로마 교황의 지원을 받아 1167년에 창설된 북부 이탈리아 도시들의 군사 연합)이 벌인 전투 당시, 독일 중무장 기병이 착용한 보호구는 11세기 이래로 거의 변하지 않았습니다. 보통 무릎까지 내려왔지만, 비싼 링메일 호버크(사슬 고리들을 연결해 만든 갑옷)의 치수는 상당히 달랐을 수 있으며, 팔꿈치 길이이거나, 여기에서처럼, 일체형 장갑이 달린 전체 길이의 소매가 있었습니다.
패딩이 들어간 상의와 때로는 긴 로브(겉옷)를 사슬 갑옷 아래에 입었고, 벨트에 매달린 별도의 메일 쇼스 위에 착용되어 다리와 발을 보호했습니다. 이 시기에 패딩이 들어간 모자 바깥에 착용한 메일 후드(코이프, 중세 잉글랜드 및 스코틀랜드 양식의 모자.)는 여전히 호버크(몸통 방어구)의 필수적인 부분이었습니다.
이 기사의 최신 헬멧은 더 이상 원뿔형이 아니라 반구형 2피스 구조이며, 코 능선으로 강화된 일체형 고정형 얼굴 마스크가 있으며 시야와 환기를 위해 구멍이 뚫려 있습니다. 방패는 이전의 '카이트(연 모양)'와 이후의 '히터' 모양 사이의 과도기적 모양이며 13세기에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신성로마제국을 상징하는 노란색 바탕과 검은색 독수리 문장이 그려진 방패를 들고 있는 것은 그가 신성로마제국에 봉사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2: 파비아의 중무장 보병
바르바로사와 이탈리아 북부 도시들 사이의 전쟁 동안,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의 도시인 파비아는 황제의 충성스러운 동맹으로 남았으며, 제국군에 합류할 군대를 보냈는데, 그 중 보병이 가장 많고 중요한 구성 요소였습니다. 잘 갖춰진 중무장 보병 민병대는 비교적 부유한 상업 또는 장인 계급 출신으로, 링메일 호버크를 살 여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헬멧은 '프리기아' 모양이며, 일체형 두개골의 정점이 약간 위로 당겨져 앞으로 향하고, 리벳으로 고정된 눈썹띠와 코막대가 있습니다.
이 창병은 왼쪽 다리에만 사슬 갑옷으로 만들어진 보호대를 착용했다는 점에 유의하세요. - 전투 대열에서 그의 자세에 의해 앞으로 밀려날 것이고, '잘린 연'처럼 생긴 방패로 보호되지 않습니다. 방패와 창에 그려진 문장은 모두 빨간색 바탕에 흰색 십자가인데,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지지하는 이탈리아 도시들의 상징입니다.
3: 작센 지역 궁수
바르바로사의 제국 군대는 보통 독일 중부 지역인 작센과 튀링겐 출신 궁수들을 포함했으며, 그 지역에서 온 귀족들의 개인 봉건 수행원들이었습니다. 이 농민 출신 군인은 일상복을 입고 최소한의 장비만 착용합니다. 리벳으로 고정한 구조의 반구형 헬멧을 천으로 만든 모자 바깥에 착용하고, 수세기 동안 북유럽과 중부 유럽에서 사용되었던 전통적인 기다란 활을 두 손으로 들었으며, 엉덩이에 칼을 차고 있습니다.
롬바르디아 동맹의 군대 1167~1237년
1: 민병대의 보병들
민병대 보병들의 장비는 동원된 시민들의 사회 계층과 재정적 수단에 따라 달랐습니다. 부유한 상인과 장인들은 일반적으로 중무장 보병이 되었지만, 대부분은 아마도 이 인물과 비슷했을 것입니다. 가난한 보병의 보편적인 보호는 솜이나 면으로 만든 패딩 재킷이었는데, 다양한 겹의 린넨 천으로 만드는 비용이 저렴했으며, 양털이나 헝겊 또는 말 털로 속을 채웠습니다. 이러한 의복은 군인의 수단에 따라 세부 사항과 정교함이 매우 다양했습니다.
2: 민병대의 보병들
이 민병대는 헬멧과 단순하고 둥근 나무 방패 외에는 보호 장비가 없습니다. 그는 가난한 하층민일 수 있지만, 그가 입고 있는 외투나 칼인 팔치온을 가지고 다닌다는 사실로 판단하면 가장 가난한 계급은 아닙니다. 이 단순하고 무거운 칼인 팔치온은 '보위 나이프' 끝을 제외하고는 단날로 되어 있으며 근접전에서 치명적이었습니다. 그의 방패에 거칠게 그려진 붉은 십자가는 롬바르드 동맹군을 상징하는 문장입니다.
3. 밀라노 기사
갑옷 아래에 입은 비싼 비단옷의 품질로 판단해 보면, 이 기사는 도시의 부유한 귀족일 가능성이 높으며, 그의 장비는 바르바로사에 대한 원정 중 이탈리아 기사들이 사용한 것과 비슷합니다. 그가 머리에 쓴 투구는 12세기 후반에 일반화되었습니다. 이것은 헬멧을 녹으로부터 보호하고 식별을 돕습니다. 그 모양과 얼굴에 메일이 덧대어진 호버크는 최신 디자인이 아닙니다. 팔에 찬 '둥근 연' 모양의 방패는 밀라노의 색상을 띠고 있지만, 흰색 바탕에 붉은 십자가는 곧 롬바르드 동맹 전체에 채택되었습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재위 기간 1220년~1250년)의 제국군, 1220~1250년
1: 미니스트리얼스(Ministerialis 귀족이 아닌 평민이나 농노 출신으로 이루어진 기병 부대)
프리드리히 2세의 군대에서 큰 역할을 한 이 미니스트리얼스의 장비는 귀족들로 이루어진 다른 봉건 군인의 장비와 거의 같았습니다. 이 미니스트리얼스는 13세기 초반에 보였던 평평한 꼭대기를 가진 큰 투구의 초기 모델을 착용하고 있습니다. 원래 추가된 얼굴 가면은 아직도 남아 있으며, 이 투구의 모습이 앞서 언급한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의 제국군 기사가 착용한 투구에서 진화했음을 보여줍니다. 닫힌 형태의 투구를 채택하면서 전투에서 아군과 적을 가려내는 일이 어려워지자, 이로 인해 아군과 적을 구분하기 위해 방패나 깃발 등에 자기 가문을 상징하는 그림들인 문장을 그려넣는 일이 널리 퍼졌고 13세기 중반에는 독특한 가문 상징이 프랑스와 독일에서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문장은 상위 귀족뿐만 아니라 하위 계급의 무장 군인도 사용했습니다. 여기서 미니스트리얼스의 몸과 팔다리 뿐만 아니라 그가 탄 말까지 사슬 갑옷으로 보호됩니다. 아마도 석궁의 화살로부터 사람과 말을 보호하기 위해서 착용했을 것입니다.
2: 루세라의 사라센(중세 유럽에서 이슬람교도를 부르던 호칭) 궁수
프리드리히의 왕실 경비대에서 보병으로 복무한 이 아랍인 궁수들의 방어 장비는 간단했습니다. 원뿔형 투구에 항상 전통적인 터번을 두르고 패딩 자켓을 입었습니다. 당시 자료에 따르면, 이 전사들은 이탈리아 동남부 지역인 풀리아에 정착한 직후 곡선 모습의 칼을 더 이상 만들지 않았고 신성로마제국 황제에 봉사하는 기독교 군인과 같은 모습의 칼을 채택했습니다. 이 그림 속 인물은 보병 궁수입니다.
(이탈리아 남부의 시칠리아 섬은 9세기 말부터 11세기 말까지 이슬람교를 믿는 아랍인들의 지배를 받았던 이유로 아랍인들이 많이 살았고, 그래서 시칠리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프리드리히 2세의 군대에는 이런 아랍인들로 구성된 궁수 부대가 배치되었다고 합니다.)
3: 트레비소의 경무장 기병
이탈리아 베네치아 근교의 도시인 트레비소 출신인 이 병사는 경무장 기병으로 복무했는데, 사냥용 창을 들고 방패처럼 생긴 방패를 팔에 쥐고 허리에는 브로드소드(직선형 양날검)을 찼습니다. 다만 방패나 투구 이외에 다른 보호 장비는 없습니다.
1260년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에서 벌어진 몬타페르티 전투,
1260년 9월 4일에 벌어진 이 전투는 두 개의 대규모 연합군 사이에서 벌어졌습니다. 피렌체가 이끌고 교황청을 지지하는 파벌인 33,000명에 달하는 구엘프가 신성로마제국 황제 편을 든 파벌인 17,000명의 기벨린과 맞서 싸웠습니다. 두 군대 모두 중부 이탈리아의 모든 구석에서 온 부대와 일정 수의 용병과 정치적 망명자들이 포함되었습니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전투선을 형성한 양측은 북쪽에 기병대를 배치하고 중부와 남쪽에 보병대를 배치했습니다. 구엘프 파벌은 숫자 면에서 기벨린 파벌보다 더 많았고 더 높은 지대에 위치해 있었으며, 태양을 등지고 있었기에 처음에는 유리했습니다. 하지만 기벨린 파벌은 독일인 기사 부대의 일부를 능숙하게 배치하고 구엘프 파벌을 상대로 귀순을 유도한 덕분에 결국 기벨린 파벌이 힘겹게 승리했습니다.
1: 피렌체의 파베시에르(pavesiere)
피렌체의 정예 부대인 파비시에르가 한 손에 든 커다란 방패에는 피렌체 도시를 상징하는 문장이 그려져 있습니다. 1251년까지는 붉은 바탕에 흰색 백합 문양이었지만, 그 해에 신성로마황제를 지지하는 기벨린 파벌이 피렌체에서 추방당하면서 그 상징을 가져갔습니다. 그 결과, 피렌체시를 새로이 지배하게 된 교황지지 세력인 구엘프 파벌은 하얀색 바탕에 붉은색 백합 문양을 피렌체시의 상징으로 삼았습니다. 이 파비시에르 병사는 머리에 주전자처럼 생긴 투구를 쓰고 몸에는 빨간색의 우수한 품질의 패딩 자켓을 입었습니다. 그의 뒤에는 피렌체에서 민병대를 동원하는 데 사용된 이동식 종탑인 유명한 마르티넬라(martinella)가 있는데, 이 종탑은 또한 전장으로 운반되었습니다.
2: 파리나타 델리 우베르티(Farinata degli Uberti)
시칠리아의 국왕인 슈바벤 만프레트가 파견한 약 800명의 독일인 기사 이외에도 기벨린(황제파) 군대에는 피렌체에서 추방된 약 200명의 기벨린 기사가 포함되었습니다. 이들은 군사적 기술과 용맹으로 유명한 유력 가문 출신의 기사인 파리나타 델리 우베르티가 이끌었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의 문장이기도 한 노란색 바탕에 검은색 독수리를 그린 그의 문장은 그가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지지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가 탄 말도 주인처럼 퀼팅(천으로 만든 외투)으로 만들어진 외투를 걸쳤는데, 이는 사슬 갑옷보다 훨씬 가볍습니다.
3: 산 마르티노의 시에나 보병
시에나 출신의 이 보병들은 짙은 갈색 패딩 위에 녹색 상의를 입고 다시 그 위에 붉은 색의 외투를 입었습니다. 또한 그의 방패에는 밝은 파란색 바탕에 난폭한 표범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시에나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1289년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에서 벌어진 캄팔디노 전투에 참가한 군사들
이 전투는 1289년 6월 11일에 벌어졌습니다. 피렌체가 이끄는 구엘프 연합군과 보병은 약 10,000명으로 기병은 1,600명이었습니다. 반면 기벨린군은 아레초가 이끄는 구엘프 파벌과 비슷한 수의 보병에 약 800명의 기병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아레초군은 4열로 배치되었는데, 기병은 1열, 2열, 4열, 보병은 3열로 구성되었고, 피렌체군의 대열과 마주 보았는데, 중앙에는 기병대가 배치되었고, 각 군대의 양쪽 측면 부분에는 보병 부대가 배치되었습니다. 전투가 벌어지자 아레초군은 중앙에서 진군했지만, 피렌체군의 날개에 양쪽 측면이 포위당하면서 패배했습니다.
1: 돌팔매를 사용하는 아레초 병사
돌팔매의 군사적 사용은 중세 이탈리아에서 완전히 포기되지 않았으며, 매우 저렴하고 간단하지만 효과적인 이 무기는 도시 주변의 농촌 지역에서 동원된 가장 가난한 민병대들이 계속 사용했습니다.
2: 체르키(Cerchi) 가문의 피렌체 페디토레(Florentine feditore)
체르키(Cerchi) 가문은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 주의 마을인 발다르노(Valdarno)의 하급 귀족입니다. 체르키 가문의 페디토리는 부유하지만 귀족은 아닌 도시 가문에서 온 젊은 기사 지망생이었습니다. 공동체 군대에 완전히 받아들여지기 전에 용맹함을 증명하기 위해 그들은 경무장 기병으로 복무했고 적에게 첫 돌격을 가하는 영예를 얻었습니다. 전투를 벌이다가 말에서 떨어진 후, 두 발로 걸으며 싸우는 이 페디토레는 가장 부유한 피렌체 가문 중 하나에서 나왔습니다. 체르키 가문은 도시의 정치 생활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강력한 상인이었습니다. 파란색 바탕에 노란색 원이 있는 그의 방패 문장은 이탈리아어로 '원'을 의미하는 cerchio에서 유래되었습니다.
3: 아레초의 주교, 구글리엘미노 델리 우베르티니(Guglielmino degli Ubertini)
이 전투에서 기벨린의 군사 사령관은 도시의 강력한 주교, 구글리엘미노 델리 우베르티니였습니다. 그의 투구에 있는 문장은 주교의 모자 모양으로 만들어졌고, 칼 대신 철퇴를 무기로 사용했습니다. 이는 중세 유럽에서 전투에 나선 성직자들이 신약성경에서 언급된 “칼로 흥한 자는 칼로 망한다.”라는 금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한 일종의 편법이었습니다. 이 주교가 입고 있는 것처럼 13세기 후반에는 사슬 갑옷 위에 함께 착용하는 단단한 가죽 갑옷이 개발되었습니다.
멜로리아(MELORIA) 전투, 1284년
1284년 8월 5~6일 이탈리아 서부의 바다인 리구리아해의 멜로리아 섬 근처에서 벌어진 이 전투는 13세기에 해상 공화국들 사이에서 벌어진 가장 중요한 해군 전투였으며, 사용된 전술은 충돌과 탑승의 오랜 조합이었습니다. 오베르토 도리아가 지휘하는 제노바 공화국은 군대의 일부를 숨겨 아르노 강 하구에서 적군인 피사 공화국의 함대를 유인해 낸 다음, 그들을 공격하여 많은 함선을 침몰시키거나 나포했으며, 수천 명의 피사 병사들을 죽이거나 사로잡았습니다. 승리한 제노바 공화국은 베네치아 공화국의 주요 경쟁자로 떠올랐고, 패배한 피사 공화국은 오랫동안 쇠퇴를 맞이했습니다.
1: 제노바 석궁병
제노바의 석궁병은 정예 부대였으며, 유럽 각국의 군대들에서 용병으로 널리 고용되었지만, 이 석궁병은 건강한 시민으로 구성된 예비 민병대에서 복무했습니다. 이들 각각은 석궁병의 방패인 파비스(pavesi)에 그려진 고유한 문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림의 석궁병은 이탈리아의 명문 귀족인 도리아(Doria) 가문이 지휘했던 멜로리아 함대에서 복무했던 병사입니다. 그의 중요한 무기는 석궁이고, 머리에 쓴 투구와 등에 걸친 파비스와 몸에 입은 패딩 자켓이 방어 장비입니다.
2: 델레 브라케(Delle Brache) 가문 출신인 피사의 기사
피사 공화국의 군사 조직은 도시 내부에 여러 개의 봉건 귀족 가문들이 도맡아서 관리했습니다. 그 중에서 부유하고 강력했던 델레 브라케 가문은 군대를 양성하고 전쟁 시에 배를 제공했습니다. 아마도 군함의 지휘관으로 추정되는 이 피사의 기사는 머리에 큰 투구를 썼고 몸에는 사슬 갑옷을 입었으며 다리 부분은 사슬 갑옷 위에 쇠로 만든 보호대를 추가로 착용했습니다. 그는 날카로운 칼인 팔키온을 들고 있는데 좁은 배 위의 전투 상황에서 효과적인 무기였으며, 다른 팔에는 피사 공화국을 상징하는 문장이 그려진 방패를 들었습니다.
3: 피사 해군에 복무하는 수병
기사를 돕기 위해 뛰어든 이 병사는 패딩 재킷 위에 단단한 가죽 갑옷을 입었는데, 가볍고 생산하기 쉬운 이런 종류의 갑옷은 13세기 후반 유럽 각 지역의 민병대에서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가 손에 든 무기는 작살인데, 해상전에서 매우 효과적이었습니다. 또한 이 병사의 흉갑에는 두 개의 문장이 그려졌는데, 왼쪽에는 피사 공화국의 상징인 붉은색 바탕에 하얀색 십자가이며, 오른쪽에는 노란색 바탕에 검은색 독수리로 그가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지지하는 기벨린 파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남부 이탈리아를 지배했던 프랑스 출신 앙주(Anjou) 왕조의 군대, 1266~1325년
(987년부터 1328년까지 프랑스를 다스렸던 카페 왕조의 분가인 앙주 왕조가 대략 13세기 중엽부터 14세기 초반까지 시칠리아와 나폴리 같은 이탈리아의 남부 지역을 지배했습니다.)
1: 로렌초 아치아이올리(Lorenzo Acciaiuoli)
14세기 상반기 가장 유명한 이탈리아 기사 중 한 명인 로렌초 아치아이올리는 부유한 피렌체 상인이자 은행가인 니콜로 아치아이올리의 큰 아들이었습니다. 1266년부터 피렌체는 이탈리아 남부에서 새로운 지배자로 군림한 앙주 왕조의 가장 중요한 동맹이 되었고, 그 상인들(그 중에서도 나폴리로 이주한 니콜로 아치아이올리가 유명함)은 거의 독점을 누렸습니다. 그의 아들 로렌초는 1353년까지 앙주 왕조에 봉사하는 기사로 싸웠습니다. 로렌초가 입은 갑옷은 앙주 왕조 군사의 화려한 복식을 보여줍니다. 사슬 갑옷을 몸 전체에 걸쳤고, 팔과 다리 부분에는 쇠로 만든 별개의 보호대를 더 착용했으며, 흉갑과 무릎 관절 부위에는 금박으로 화려하게 장식이 된 각종 문양이 들어갔습니다.
2: 프랑스의 동남부 지역 프로방스 출신인 보병 서전트(장교)
보병과 기병 부대에 모두 소속된 서전트는 1266년 앙주 가문 군대의 핵심이었습니다. 이들은 경험이 풍부한 전문 군인이었고, 프로방스에서 온 사람들은 앙주 가문에 대한 충성심이 강했기 때문에 용감하게 싸웠습니다. 이 군인은 머리에 쇠 투구를 쓰고 몸의 상반신에는 사슬 갑옷을 입었으며, 다시 그 위에는 솜을 넣고 압축한 외투인 퀼팅을 걸치고 다리 부분에도 같은 퀼팅으로 만든 보호대를 착용했습니다. 그의 방패에는 프랑스 왕실을 상징하는 푸른색 바탕의 황금색 백합 3개가 그려졌으며, 한 손에는 창의 일종인 부주(Voulge)를 들고 허리에는 장검과 단검을 찼습니다.
3: 디라키움(알바니아 서부 도시인 두러스)의 알바니아인 궁수
앙주 가문 출신으로 시칠리아와 나폴리의 국왕인 샤를 드 앙주는 1271년 알바니아 대부분을 정복하여, 장차 동로마 제국까지 공격하려는 군사적 계획의 병참기지로 삼고자 했습니다. 이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앙주 왕조가 알바니아 지역에 가진 영토는 1368년까지 유지되었습니다. 앙주 왕조의 영토를 방어하기 위해서 알바니아 출신 병사가 모집되어 이탈리아 남부로 파견되었는데, 이 보병 궁수는 당시의 전통적인 알바니아 방식의 모자와 퀼팅 자켓을 착용했으며, 동로마 제국의 영향을 받은 합성궁과 튀르크족 스타일의 휘어진 검(세이버)으로 무장하고 있습니다.
아라곤 군대, 1282~1325년
1: 카탈루냐 기사
오늘날 스페인 동부 지역의 아라곤 왕국이 앙주 왕조가 시칠리아에서 민중들의 봉기로 쫓겨난 이후부터 시칠리아를 포함한 이탈리아 남부 지역을 지배했습니다. 아라곤 왕국의 카탈루냐 지역 출신인 이 기사는 전함의 사령관으로 추정되며, 쇠로 만든 투구를 머리에 쓰고 사슬 갑옷을 몸에 입었으며, 무릎과 다리를 보호하기 위해 별도로 보호대를 더 착용했습니다. 그는 긴 장검을 허리에 찼는데, 이는 그가 가진 부유함을 보여주는 상징이기도 합니다.
2: 카탈루냐 출신 석궁병
아라곤 함대의 강력함은 지중해 전역에서 유명했던 선원과 석궁병의 뛰어난 훈련도 때문이었습니다. 배 위에서 복무할 때 석궁병은 일반적으로 갑옷을 입지 않았는데, 그 덕분에 해전에서 빨리 움직였고 바다에 빠져도 수영을 하여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이 석궁병은 석궁 이외에도 백병전을 대비하여 단검을 허리에 찼습니다.
3: 알모가바르(Almogavar) 경보병
알모가바르는 대략 서기 9세기부터 스페인에서 활동했던 경무장 보병 부대였습니다. 그들의 가벼운 무기(창, 투창 두 개, 큰 칼)와 한 사람당 가방 하나로 제한된 짐은 모든 지형에서 놀랍도록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금속이나 가죽으로 만들어진 투구를 쓰기도 했지만 보통은 그보다 더 가벼운 천으로 만든 모자를 썼습니다. 알모가바르는 수염을 가득 기르고 짧은 튜닉, 가죽 바지, 가벼운 가죽 샌들을 신고 매우 형편없는 옷을 입었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항상 좋은 부싯돌 조각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알모가바르 병사들은 전투에 나가기 전에 무기에 부싯돌을 두드려 적을 무서워하게 하는 불꽃을 일으키고, 전투 직전에는 ‘강철이여, 일어나라!’는 뜻을 담은 구호인 데스페르타 페로!(Desperta ferro)를 외쳤습니다.
[출처 : 오유-유머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