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들이 꽃에서 채취한 당을 몸안에서 화학 작용을 통해 배출하는 물질이 밀랍입니다.
밀랍은 일상생활의 여러 가지 부분에서 매우 유용하게 사용되는데, 아직 종이가 전파되지 않았던 중세 시절의 유럽에서는 나무로 만든 판 위에다가 쇠로 만든 펜으로 글씨를 썼는데, 간혹 그것을 습기에서 오래 보존하거나 혹은 숨기기 위해 나무 판 위에 밀랍을 입혔습니다.
또한 밀랍은 접착제의 일종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기술자 다이달로스와 그의 아들인 이카로스는 크레타의 미궁에 갇혀 있었는데, 다이달로스가 새들이 흘린 깃털들을 모아서 이것을 어깨에다가 녹인 밀랍으로 붙여서 일종의 날개를 만든 다음, 아들과 함께 미궁을 날아서 빠져나갔다는 이야기도 언급됩니다.
그 밖에도 밀랍은 밤의 어둠을 밝히는 물건인 양초를 만드는 데에도 반드시 필요한 물건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이 밀랍 때문에 전쟁이 벌어져 나라가 망하고 역사가 바뀌는 일도 간혹 일어났습니다.
오늘날 중국 동북부, 만주 지역은 원래 수렵과 농사와 낚시를 하면서 살아가던 부족 집단인 만주족들이 살아가던 땅이었습니다. 만주족은 한국의 고대 왕조인 부여 시절에는 읍루족, 삼국 시대에는 말갈족, 고려 시대에는 여진족이라고 불렸습니다. 이들은 고구려와 발해에 복속되어 살다가 발해가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에 망하자 요나라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갔습니다.
헌데 중국 사서에서는 이 여진족의 조상인 읍루와 말갈족을 가리켜 "동굴 속에 살면서 집의 가운데에 화장실을 만들어 대소변을 누었고 글자가 없었으며 오줌으로 얼굴을 씻었다."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그만큼 여진족들이 주변의 다른 민족들에 비해 문화적인 수준이 뒤떨어졌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요나라의 거란족들은 여진족들을 매우 깔보고 업신여겼습니다. 여진족들은 자신들이 하고 있던 양봉을 통해 채취한 밀랍을 시장인 각장에 가서 거란족들을 상대로 팔았는데, 거란족들은 여진족들이 가져온 밀랍을 그들이 부르는 원래의 가격보다 더 낮게 사들였습니다.
이런 처사에 여진족들이 항의하거나 화를 내면, 거란족들은 여진족들한테 욕설을 퍼부으며 폭행하는 일이 잦았는데 이것을 타여직(打女真)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여기서 여직이란 여진족을 부르는 다른 이름이니, 곧 타여직은 '여진족을 때린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거란족들의 횡포에 당하고 살던 여진족들은 자연히 그들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쌓여갔는데, 급기야 1114년 여진 완안부족의 추장인 완안아골타(1068~1123년)는 여진의 여러 부족들을 통일하고 요나라에 맞서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처음에 요나라는 이 소식을 듣고 무척이나 우습게 여겼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당시까지만 해도 요나라는 그 국력이 중원의 송나라와 서하마저 굴복시킬 만큼 동북아의 최강대국이었던 반면, 아골타가 이끄는 여진족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부족 집단으로 나누어져 살아가던 가난하고 미개한 집단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요나라에 대한 복수의 일념으로 불탄 아골타와 그가 이끄는 여진족들은 요나라 군대와 싸울 때마다 승리를 거듭하였습니다. 그 중에서 각장이 설치된 지역은 과거 타여직이라 불리며 모욕과 멸시의 대상이 되었던 여진족들의 분노를 사서, 그곳에 살고 있던 거란족들은 아이와 성인을 가리지 않고 모두 여진족들한테 죽임을 당했습니다.
당시의 정황을 묘사한 역사서인 거란국지의 구절을 보면, 여진족 병사들이 긴 창으로 거란족 아이들을 찔러 죽이고 그 시체를 창에 꽂힌 채로 들고 다니면서 웃고 춤을 추었다고 하니, 여진족들이 얼마나 거란족에 대한 분노와 복수심에 불탔는지 알 수 있어서 매우 섬뜩합니다.
결국 1125년, 요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천조제는 서쪽으로 도망치려다가 금나라 군대한테 붙잡혔고 요나라의 모든 영토는 1115년 아골타가 세운 금나라에 의해 점령당함으로써 요나라는 여진족이 반란을 일으킨 지 불과 10년 만에 멸망하였습니다.
밀랍 때문에 벌어진 다툼이 나라를 몰락시켰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