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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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날

김찬 0 12,681 03.18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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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의 CEO 마크 저커버그가 하와이 카우아이에 있는 자신의 저택에 2200억 원을 들여 자급자족이 가능한 465㎡ 넓이의 지하 벙커를 만들고 있다고 한다. 지난 11월 22일 넷플릭스에 공개된 영화 '리브 더 월드 비하인드'는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없는 국제적 테러로 인해 교통, 통신, 운송기기 등 국가를 이루는 시스템이 무너지는 현실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2020년 루만 알람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데, 제작자가 전 미국 대통령인 오바마라는 사실에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평소에도 쓸데없는 담소를 나눌 수 있는 주변인에게 "가장 좋아하는 영화 하나만 꼽아 봐."라거나, "곧 죽을 건데 음식 하나만 먹을 수 있다면 뭘 먹을 거야?"같은 질문을 종종 묻곤 했다. 영화라면 가장 많이 들은 대답이 '살인의 추억'이었는데, 영화를 아주 좋아하는 사람도 그다지 관심 없는 사람도 나이에 상관없이 살인의 추억을 많이 꼽는다는 사실이 꽤나 놀라웠다. 음식에 대한 질문에는 보통 김치찌개든 된장찌개든 갈비찜이든 어머니 음식을 주로 대답하곤 하는데, 인상적인 대답으론 나를 가리키며 "너네 엄마 음식." "왜 너네 엄마가 아니고?" "우리 엄마 음식 맛없어, 너네 엄마 음식이 맛있어."라고 말한 친구가 두 명이나 있었던 신선한 답변이 있었다. 더 놀라운 대답은 버거킹의 와퍼를 먹고 싶다고 말한 직장 동료가 있었다. "야, 곧 죽고 음식 하나 먹을 수 있는데 햄버거를 먹겠다고?" "왜요, 제 맘이잖아요. 전 햄버거가 좋아요."라고 말했는데, 물론 개인의 취향은 존중하지만 지금 생각해도 나로선 이해하기 어렵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1997년 줄리아 로버츠와 멜 깁슨이 주연한 '컨스피러시'다. 가장 좋아하는 영화라고 말하기엔 좀 애매할 수도 있는데, 워낙 재밌는 영화도 많고 어떨 땐 최근에 본 영화가 가장 재밌는 영화 같기도 하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죽기 전에 볼 수 있는 한 편의 영화를 고르라면 '매드 맥스'랄지 '타짜'같은 영화가 보고 싶을 수도 있다. 훨씬 따듯하거나 잔잔하거나 우울한 영화가 보고 싶을 수도 있다. 그때 기분은 알 수 없으니까. 음식도 그러려나.

그럼에도 컨스피러시를 가장 좋아하는 영화라고 꼽은 이유는, 영화를 두 번 이상 보는 경우는 흔치 않은데 컨스피러시는 대략 여덟 본 정도 본 영화이기 때문이다. 곧 죽는다거나 생의 마지막 날 볼 영화로 고른다는 건 아니다. 영화 볼 시간이 없을 수도 있고 별로 보고 싶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책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에서 책의 저자가 모리에게 질문한다. "교수님, 건강한 하루가 주어진다면 어떻게 보내시겠어요?" 모리가 그 질문을 받을 때는 이미 거동이 불편한 상태였다. 모리가 말한다. “아침 일찍 일어나 조깅을 하고 아침을 간단히 먹고 책을 읽을 거야. 점심은 가족과 보내고 산책을 할 거야. 저녁엔 친구들을 초대해 식사하고 춤을 추며 조촐한 파티를 즐기고 잠자리에 들 거야.”

한 달 뒤에 죽는다면, 일주일 뒤에 죽는다면, 내일 또는 오늘밤이 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어떻게 보내야 할까? 나도 이런 생각을 해본 적 있다. 이삼십 대 언제인지 정확히 모르지만, 여행이나 바다를 떠올리기도 했고 고향을 말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서는 바다나 고향보다 나도 모리 교수와 비슷한 생각을 했다. 아침에 일어나 조깅이나 산책을 하고 가족과 식사를 하고 책도 조금 읽고 바다가 아니어도 도심가를 벗어난 곳에서 마시는 커피 한 잔도 괜찮겠다고. 중요한 건 뭘 하느냐 보다 누군가와 함께 있느냐일 것이고 조바심 내지 않는 여유 있는 하루를 보낸다는 게 가장 중요한 지점이 아닐까.

영화 '멜랑콜리아'의 마지막 장면엔 가족이 손을 잡고 종말의 풍경을 바라보며 끝난다. 만약 오늘 밤 지구가 멸망한다면, 오늘 밤이나 새벽에 내 생이 끝난다면, ‘멜랑콜리아'처럼 또는 '딥 임팩트'의 노부부처럼 사랑하는 이의 손을 잡고 종말을 맞이하는 건 좋은 생각일까? 난 종말 몇 시간 전에 아버지와 한 방에서 어색하게 누워 미리 잠이 들거나, 애인을 안고 평소처럼 잠드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두 시간이나 몇 시간 후 죽거나 멸망할 거라는 걸 알면서도 삼십 분이 넘지 않는 뒤척임 후에 잠이 드는 것이다. 뒤척임의 어지러운 생각들 중 무엇을 가장 후회할까? 못 가 본 곳, 못 해본 일, 맛보지 못한 음식이나 다시금 먹지 못한 음식을 생각할까? 아무래도 더 잘해주지 못한 걸 후회할 것이다. '더 잘해줄걸.'같은 생각 말이다.

영화 '컨스피러시'를 가장 많이 본 영화로 꼽았었는데 지금 다시 보면 지겨울지도 별 감흥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 영화를 보며 여러 번 울었다. 슬픈 영화도 아닌데 그 영화를 볼 때마다 자주 울었던 이유는 7ㅐ 같은 사랑 때문이다. 7ㅐ 같은 사랑이라는 말이 어감이 이상한데, 멜 깁슨이 연기한 제리는 줄리아 로버츠가 연기한 앨리스를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지켜보고 보호한다. 몰래 사랑한다. 당연히 서로 사랑함을 꿈꾸겠지만, 그저 사랑한다. 그래서 눈물이 났다. 나는 그런 사랑을 해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다.

마지막 날, 미리 누운 이불속에서 옆에 어색한 아버지가 있을지 애인이 있을지 모르지만, 뒤척이다가 손을 잡든 끌어안든 이런 확신이 들길 소망한다. '진짜예요. 7ㅐ 같이 사랑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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