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헌이라는 가마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문관으로서 2품 이상은 외바퀴뿐인 높은 수레를 타는데, 그것을 초헌(軺軒)이라고 한다. 바퀴는 작으면서 수레 높이는 한 길이나 되어 탄 모양을 바라보면 사닥다리로 지붕에 오를 듯하니, 그 위태로움은 말할 수가 없다. 움직일 때는 다섯 사람이 아니면 안 되고, 또 반드시 따르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옛날에 수레를 만든 것은 수레 하나로 사람 다섯을 태우려고 한 것인데, 지금 수레는 다섯 사람이 걷고 한 사람이 탄다.“
박제가 <<북학의>> 발췌
아무나 탈 수 없는 초헌
조선 시대는 엄격한 신분 사회였지만, 법적으로는 문무과(文武科)의 과거(科擧) 시험을 통해 신분 상승이 가능하였다.
또한 음직(蔭職)이라 하여 조상의 공(功)으로 벼슬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문과 시험을 거쳐 문관직에 나아가는 것을 최고의 출세이자 영광으로 여겼다. 문과 급제는 재상 반열에 오르는 것을 기약하는 것이고, 이는 곧 초헌을 탈 수 있는 전제 조건이 되었기 때문이다.
초헌은 아무나 탈 수 있는 수레가 아니었다.
예외적인 경우도 있었지만, 특별히 문과 출신의 2품 이상 문관에게만 허락되었다.
설령 2품 이상의 문관직에 올랐어도 나이가 젊으면 탈 수 없었다.
또 2품 이상의 무관직이 초헌을 타고 다녀도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무관은 원래 가마는 물론 초헌도 탈 수 없었다. 이것은 문관과 차별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무관은 무비(武備)에 힘써서 평상시에도 말을 달려 몸에 익혀야 하므로, 아무리 높은 벼슬에 올랐어도 예외가 없었다.
종종 무관들이 이 규제를 무시하고 초헌을 타자, 1731년(영조 7)에는 무관 장군이 초헌을 타는 것을 영원히 금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음직으로 2품의 문관직에 올랐어도 초헌을 탈 수 없었다.
그래서 5품 이상의 음직 출신은 출세를 위해, 장원급제를 해도 겨우 6품에 불과한 문과 시험에 도전하기도 하였다. 그것은 ‘음직’이라는 꼬리표를 떼야 재상도 되고 초헌도 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헌은 혼자서 타거나 내릴 수도 없어서 수행원이 항상 따라야 했고, 또한 홀로 설 수도 없어서 담장이나 나무 등에 기대어 세워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또 울퉁불퉁 파인 길에선 긴장하지 않으면 혀를 깨물기 쉬웠고, 구불구불한 좁은 길에선 담장 밖으로 튀어나온 처마에 머리를 부딪치기 쉬웠다.
박제가(朴齊家, 1750~1805)는 초헌을 탄 모습을 보면 마치 사다리로 지붕에 오른 듯하여 위태롭고, 또 한 대의 수레에 다섯 사람을 태워야 하는데 한 사람을 움직이기 위해 다섯 사람이 있어야 한다면서 초헌의 비효율성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여러 이유 등으로 1894년(고종 31)에는 고위직 관리들의 전용 수레였던 초헌은 영구히 폐지되어 이후로 더 이상 제작하거나 활용되지 않았다.
그래서 500여 년 동안 관리들의 선망 대상이었던 초헌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 그림이나 박물관에서나 겨우 볼 수 있는 유물이 되었고, 이제는 솟을대문만이 초헌이 드나들던 자취를 보여주고 있다.
[출처 : 오유-유머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