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폭삭 속았수다’를 봤어. 보는 내내 울고 웃었지. 아내도 마찬가지. 둘이 힘들게 지냈던 시절이 떠올랐고, 무엇보다 없는 살림에도 자식들 뒷바라지에 등이 휘었던, 이젠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 때문이었어.
오래전, 아내가 부산 동래에 용하다는 철학관 다녀온 얘기를 내게 한 적 있었어. 당시 나는 회사를 그만두고 조그만 사업체를 막 시작하려는 참이었지. 잘 다니던 직장 때려치고 사업이란 걸 한다니 내내 안색이 어두웠던 아내는 그날따라 싱글벙글 웃으며 얘기하는 거야.
‘대운이 들었다.’
철학관 관장인지 점쟁인지 하는 분이 나의 사주를 보고 단박에 그리 얘기했다더군. 직장 그만두고 사업을 한다니 아내는 걱정이 얼마나 많았겠어. 평소 점 보러 다니는 여인들을 할 일 없어 그런다, 그리 자존감이 없냐며 흉보던 여인이었거던.
그 말 듣고 나 역시 솔깃했어.
‘정말 그럴까’
운이라곤, 초등학교 소풍 보물찾기할 때, 그 흔한 종이 쪼가리 하나 찾지 못했던 내게도, 큰맘 먹고 산 로또 십만원치, 그 흔한 5천원 짜리 하나 찍지 못했던 내게도 운이란 게 찾아오는 걸까, 그것도 ‘대운’이란 것이.(로또 십만원치 20장, 100개를 적어 낸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니란 걸 그때 알았어. 다 마크하는데 아내와 둘이서 두 시간 정도 걸렸으니까)
개뿔, 스타트 한 그해도 다음 해도, 10여년이나 지난 지금도 대운은 고사하고, 아직도 자금난에 허덕이고 근근이 메꾸며 아등바등 살지. 월초엔 매출 걱정, 월말이면 수금 걱정, 뭐 마음 편한 날이 한달 중 얼마나 될까.
그런데 말이야, 요즘 나이 들어서인지 문득 그 철학관 관장인지 점쟁인지 하는 분의 말이 생각 나, 그 ‘대운’이란 게 정말 오지 않았을까?
내게 큰 병이 올 수도 있었을 터인데 그 대운이란 게 와서 그냥 지나가지 않았을까?
교통사고가 크게 나 생고생할 수 있었을 터인데 그 대운이란 게 와서 그냥 지나지 않았을까?
집에 불이 나 가족 중 누군가 크게 다칠 수도 있었을 터인데 그 대운이란 게 와서 그냥 지나지 않았을까?
거래처에 큰돈을 떼일 수도 있었는데 그 여파로 바로 사업 접을 수도 있었을 터인데 그 대운이란 게 와 그냥 지나진 않았을까?
극중 광식이와 애순이가 딸내미 유학 보내려 집 팔고 가게 계약을 접는 SCENE이 내겐 남다르게 다가왔어.
어린 시절, 내가 온전히 기억나는 장면이 몇 있어. 고향 마을 앞, 두 마지기 논을 판 날 저녁, 아버지는 말없이 소주를 드셨고 어머님은 그냥 훌쩍이셨지. 고작 다섯 마지기 논에 두 마지기씩이나 팔았으니 당연히 이듬해 소출은 그만큼 줄 것이니 막막하셨겠지. 무엇보다 농부에게 논이란 자식같은 것이었거던. 하지만 갓 대학 입학한 장남 등록금에, 둘째 딸 시집보내려니 어쩔 수 없으셨겠지. 논 팔고 소 팔아 대학 보낸 형님이 졸업을 앞두고 한쪽 시력을 잃었을 때도 마찬가지였어.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산다는 장삼이사라 해서 살며 어디 크고 작은 사건, 사고 없었겠어. 놓고 싶다는 생각, 다 포기하고 싶다는 그런 마음 없었겠어. 하지만 그때마다, 시시때때로 바가지 빡빡 긁다가도 어쩌다 벌이가 괜찮아 두둑한 봉투 주면 여우마냥 웃으며 등 두드려 주는 마누라 땜에, 공부와는 담쌓고 맨말천날 친구들과 술 쳐 마시며 놀러다니다가도 어머님 돌아가신 날 위로랍시고 힘든 일, 마다않고 나 대신 분주히 일해주던 아들인지 원수인지 하는 놈 땜에 나도 힘을 얻고 있었던 게 아닐까. 당장 떼려치고 싶다가도, 거래처 사장 면전에다 시원하게 욕 함 퍼붓고 거래를 끊고 싶다는 생각이 수없이 들다가도 다음날 베시시 웃으며 ‘사장님 반갑습니다.’ 할 수 있는 것도 우리 부모님이 내게 그랬듯이 나 역시 아내가, 자식, 내 가족이 눈에 밟혀서이지 않을까.
명품 옷이며 빽 하나 사주지 않아도 힘들 때 내 곁에 있어 주고, 대충 키웠는데도 착하고 건강하게 커 준 것이야말로 크나큰 운, 내게 든 ‘대운’이라는 생각이 요즘 부쩍 들어.
세상은 몇몇 지도자, 대단한 사람들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공동체의 최고 작은 단위인 가족을 지켜서라 나는 생각해. 그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한 사회를 그래도 살만하게 만든다고 여겨. ‘폭삭 속았수다’를 보며 다섯 남매 건강하게 키워 준 부모님이 생각났어. 또 어려운 시기를 견뎌내는 이 시대의 가장들이 생각났어. 지극히 평범함 당신들이야말로 실은 가장 위대한 사람들이 아닐까하고.
[출처 : 오유-유머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