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경제학부 이준구 교수님의 글입니다.
<소득주도성장 정책은 경제위기의 본질이 결코 아니다 >
2018.12.11
요즈음 우리나라 사람들은 ‘경제위기’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것 같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지인이 인사를 마치자마자 물어오는 것도 경제위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것입니다.
내 기억에 1997년 말의 외환위기 이래 20년의 세월 동안 우리 사회에서 경제위기라는 말이 자취를 감춘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요즈음처럼 많이 입에 오르내리던 때도 없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보수언론과 보수야당은 때를 만난 듯 당장이라도 나라 경제가 망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요란을 떨어댑니다.
우리 경제가 (어떤 동화에 나오는) 수수깡으로 만든 오두막집도 아닌데 그렇게 하루아침에 무너져 버리겠습니까?
당장 망하기라도 하는 듯 떠들어대는 사람들에게 정말로 그리 되기를 원하느냐고 묻고 싶은 심정입니다.
이 과정에서 마치 악의 축(axis of evil)처럼 매도되는 것이 바로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 정책입니다.
모든 위기의 뿌리가 마치 그 소득주도성장 정책에 있는 듯 몰아세우는 걸 봅니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경제위기의 본질이 그보다는 훨씬 더 근본적인 요인과 끈 닿아 있다는 사실은 전혀 인식하지 못한 채 말입니다.
지난 번 글에서 밝혔듯, 나도 현 정부가 너무 서둘렀고 그 결과 상당한 부작용을 초래했다는 점은 인정합니다.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이나 근로시간의 제한 같은 조치에 대해 시장이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할 것을 미처 예상하지 못한 실책을 저지른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미숙련, 저임금 노동자들과 영세 자영업자들을 오히려 더욱 어렵게 만든 점이 있었습니다.
나는 정부가 소득주도성장 정책이 가져온 부작용을 심각하게 반성하고 고쳐야 할 점은 흔쾌히 고쳐야 한다고 믿습니다.
체면 차리는 데 급급해 너무 과격한 정책이 가져온 부작용에 애써 눈 감는 것은 용기 있는 자세가 아닙니다.
시장이 말하는 바에 겸손하게 귀 기울이고 고칠 데가 있으면 서슴지 않고 고쳐나가는 것이 진정한 용기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의 본질은 결코 아닙니다.
한때 우리를 먹여 살렸던 조선업, 철강업이 무너지기 시작하고 자동차산업마저 어려워진 상황에서 그나마 경쟁력을 갖고 있는 반도체, 휴대폰마저 무너지면 과연 우리는 무엇으로 먹고 살아야 하나?
선진국은 멀리 도망가고 중국이나 인도 같은 신흥국은 숨 가쁘게 따라오는데 우리는 지금 도대체 무얼 하고 있는 것인가?
바로 이런 우리 경제의 근본적 취약성이 우리가 맞고 있는 위기의 본질인 것입니다.
실업률이 몇 % 포인트 올라갔다거나 양극화가 더 심해졌다는 것 역시 심각한 문제이긴 하지만 그것이 위기의 본질은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현상이 나타나게 만드는 데 일조한 소득주도성장 정책이 모든 문제의 근원은 결코 아닙니다.
보수언론과 보수야당 말대로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었다면 최저임금을 현 정부 출범 이전의 수준으로 돌려놓음으로써 우리 경제는 즉각 위기에서 벗어날 것 아니겠습니까?
정부가 체면이 깎이는 수모를 무릅쓰고 그런 조치를 취했다고 가정해 보기로 합시다.
자영업자의 부담이 조금 가벼워지고 미숙련 노동자들의 일자리가 약간 늘어나는 효과가 나타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의 본질적 측면에 이렇다 할 개선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 우리를 먹여 살릴 주력 기업이 눈에 띠지 않는다는 근본적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을 뿐입니다.
오늘의 위기는 문재인 정부의 등장과 더불어 갑자기 생겨난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투자 부진이 문제의 핵심이라고 본다면 그 문제는 이명박, 박근혜 정부 때부터 계속 이어져 온 것이 아닙니까?
더 멀리는 외환위기 직후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부터 생겨난 문제라고 볼 수 있구요.
이 정부가 해놓은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말들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이명박, 박근혜 정부가 해놓은 일 중 여러분들 기억에 남는 게 하나라도 있습니까?
고작 했다는 것이 천문학적 예산을 들여 국토를 망쳐 놓은 일과 부동산 투기 부추겨 서민들을 삶을 더욱 고달프게 만든 것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들은 단기적 부양에만 목을 매달고 있었을 뿐 우리 경제의 근본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했습니다.
외환위기 이래 20여 년 동안 우리 경제는 줄곧 투자 부진의 문제로 시달려 왔지만 이를 시원하게 해결한 정부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새 정부 출범 초에는 청와대에 초청된 재벌들이 투자 많이 하겠다고 약속해 놓고서는 곧 흐지부지 해버리고 마는 일이 계속 반복되어 왔습니다.
내 기억에 기업들의 과감한 투자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한 정부가 하나도 없습니다.
구조조정의 부진으로 인해 좀비 기업들이 우리 경제의 활력을 좀먹고 있지만 그것도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잖습니까?
매일 구조조정이 필요하다는 말만 늘어놓았지 구체적으로 이루어놓은 실적은 거의 없었습니다.
역대 정부의 그런 안일함이 오늘의 위기로 이어진 것이 분명할진대 왜 임기의 절반도 안 지난 이 정부의 탓만을 하는 건가요?
규제철폐만 해도 그렇습니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는 입만 열면 규제철폐를 부르짖지 않았습니까?
그들이 집권한 9년이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인데, 만약 그들이 충분한 정도의 규제철폐 실적을 올렸다면 왜 지금 새삼스레 규제철폐가 가장 긴급한 현안과제라는 말이 나오겠습니까?
결국 말만 앞세웠지 해놓은 것은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규제 때문에 기업 할 마음이 나지 않는다는 말이 나오는 것 아닌가요?
이렇듯 우리 경제가 앓고 있는 병폐의 뿌리는 길고 깊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 오래 묵은 고질병이라는 말인데, 이것이 하루아침에 해결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런 본질적 측면을 무시하고 애먼 소득주도성장 정책에만 몰매를 가하는 것은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차분하게 위기의 본질을 분석하고 효과적인 대응책을 찾으려 하는 자세입니다.
나라 경제가 곧 망한다는 식의 선동적인 발언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그런 선동적인 발언을 하는 사람들 보면 건설적인 대안은 하나도 제시하지 않고 그런 무책임한 말만 늘어놓기 일쑤입니다.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의 해결은 한 정부의 임기 안에 끝낼 수 없는 길고 끊임없는 노력을 필요로 합니다.
또한 구조조정이나 규제철폐 같은 당면과제뿐 아니라 연구개발 환경의 개선이나 교육 개혁을 포함하는 전방위적 혁신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모든 국민의 지혜를 모아야 하며, 그렇게 하려면 국민과 소통할 수 있는 통로를 더욱 넓혀야 합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의 본질은 우리 경제의 구조적 취약성입니다.
소득주도성장 정책에 대한 마녀사냥은 정부, 여당을 궁지로 모는 데 효과적인 수단이 될지 몰라도 위기의 본질적 해결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위기의 핵심을 정확히 꿰뚫고 이에 알맞은 대응방안을 찾아내야만 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